초록바람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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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유혹,

#. 버리듯 묵혀 두었던 낙관 도구들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 접부채 30개를 주문하여 먹고사는 일과 아득한 얘기들을 써넣고는 눈 위의 발자국처럼 꼭 꼭 눌러 낙관을 찍은 뒤에 마을 어울림 동무들에게 일일이 나눌 생각이다. #. 더운 날들 맘껏 바람피우시라... 는 당부와 함께, #. 열개쯤 심은 오이가 온 힘을 다 해 오이를 매달기 시작했으므로 #. 아침 밥상에도 오이 점심 밥상에도 오이 저녁 밥상에도 오이, #. 온 힘을 다 해 오이 먹어치우기, #. 뿐 인가? 보리수와 자두가 맘껏 익었으므로 아이들에게 전화, 하늘의 붉은 베풂을 미끼 하여 유혹에 또 유혹, #. 그래봤자 내 발등 찍는 노고가 되겠지만, #. 아내의 도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이박 하고도 삼일째, 산골 누옥을 거점 삼아 주변..

풍경소리 2023.06.26

세 시간 농사,

#. 재너머 작은 도시의 거리에는 덩치 큰 열 덩어리들이 뜨거운 바람과 함께 굴러 다니고 있었다. #. 더위가 아니라 태양의 피폭이다. #. 가방 속에 차가운 물과 양산과 부채와 손수건을 넣었다. #. 마스크와 뒤바뀐 이 계절의 필수품이다. #. 사람들 모두 하늘의 지나침을 성토했지만 사람의 지나침에 대해서는 그저 묵묵히 입 닫은 채 #. 냉방기 가동으로 조금은 소슬하게 느껴지는 건물, 거리로 나서면 그 열기가 곱에 곱으로 느껴지는 인위와 무위의 부단한 충돌, #. 더군다나 몇몇 상점의 열린 문 밖으로 흐르는 냉기는 더운 거리에서 징검다리를 밟는 느낌이 들게 했다. #. 이 더위 속에 소금 난리가 났다. 가격은 나날이 치솟는데 줄을 서서도 구 할 수가 없노라는 풍문들, #. 맘 놓고 싱거운 사람이 되어 ..

풍경소리 2023.06.20

산골 홀로 밥상,

#. 며칠째 앞산 뻐꾸기가 말을 걸어왔으나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 확률 60%의 비소식은 또 헛소문이 되어 예보는 질척하고 하늘은 뽀송하였다. #. 다음 달에는 야유회 겸 바깥 모임을 하자고 하여 달력을 살펴보니 초복과 중복과 소서와 대서가 빼곡히 누워 있었다 마음껏 더울 모양이다. #. 밭 둑과 길 둑과 어디든 더북한 풀밭을 예초기 초식으로 몽땅 제압한 뒤, #. 흐르는 샘물에 땀을 씻고 받아 든 아침 상 앞에서 모처럼 의기양양 하였다. #. 자두나무 아래 감겨있는 바람 속에 단내가 뭉근하니 곧 태양빛으로 익을 모양이다. #. 유월의 서툰 그늘에 앉아 누구와 더불어 저 붉은 단맛을 나눌꼬? #. 오늘 아침 걷기 길에는 잠깐 다람쥐 두 마리가 동무해 주었다 수줍게 엎드려 있..

소토골 일기 2023.06.16

처락적 3학년과 철학적 일곱살,

#. 학교를 왜 매일매일 가야 하는가? 엄마 말대로 꼭 가야 하는가? 이를 심오하게 궁구하던 정우가 이미 수업을 시작한 학교 문 앞에 홀로 앉아 이토록 심오한 의문에 대한 하늘의 답을 꽃점으로 얻고자 하여 꽃 하나에 학교 간다 꽃 둘에 학교 안간다...로 간다 안 간다... 열심 중인데 교실 창문 너머를 째려보던 선생님에게 껄림으로써 현장에서 압송되었다는 거다. 처락적 3학년과 햄버거 집에 마주 앉아 땡땡이 불발의 비운을 아이스크림으로 위무하였다. 다음엔 점을 치는 꽃송이를 줄이고 핵교에 가냐 안가냐를 점 치기 전에 선생님께 껄릴건지 안 껄릴건지를 먼저 점 쳐 보도록 권고 하였다. #. 유별나게 곤충을 좋아하는 일곱 살 정환이는 주머니마다 이 곤충 저 곤충 심지어는 지렁이에 도마뱀이 튀어나오기도 함으로써..

소토골 일기 2023.06.10

공동 육묘,

#.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주머니 곳곳에서 마스크가 출토되고 있다. #. 재너머 소도시의 이비인후과 의원은 대학병원을 방불케 하는 장사진, #. 감기인지 코로나인지 독감인지... 정체불명의 고뿔을 끌어안고 너도 나도 병원 순례 중, #. 낫는 듯 하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세 번쯤, 아무래도 뜨끈한 콩나물 국에 청양고춧가루를 듬뿍 풀어 코로 마셔야겠다. #. 부처 모양의 향꽂이에 인도산 샐비어 향을 하나 피웠더니 시바의 미소 가네샤의 위용이 너울거리고 박타푸르의 어느 작은 식당에서 먹던 탈리의 기억, 향불의 연기 속에서 진한 커리향이 느껴졌다. #. 옥수수 밭고랑에 잡초 억제용 비닐막을 까는 대신 괭이를 휘둘러 한나절 신공을 펼친 끝에 몽땅 제압한 뒤, 의기양양 돌아 선 등 뒤에서의 한마디, 비 온 뒤에 한..

풍경소리 2023.06.08

신장개업,

#. 10년 넘은 노트북의 부팅 속도가 점 점 점 점 느려졌으므로 아항~ 이 컴터는 충청도에서 만든 건가 보다... 했었는데 이노무 기계조차 노쇠 증세였다는 거였다. #. 미학일 수 없는 느림에 더 해 가끔씩 발라당 누워 버린 뒤 꼼짝달싹 할 수 조차 없는 파업을 하기도 했으므로 #. 아들에게 전화하여 물었다. "노트북을 바꿔야겠는데 문방구에서 사면되니?" #. 전화기 너머의 한숨과 탄식, "아 아~! 산속에서 늙어버린 나으 아부지~" #. 서울 사는 아이가 늦은 밤 길을 달려와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 새 노트북은 그 새 이렇게 저렇게 진화하여 손전화와 함께 입 벌어지는 재간을 부렸으므로 모처럼 자식 키운 흥복을 누릴 수 있었다. #. 아내가 여름용 자작 패션으로 변신한 뒤 이런저런 뽐새로 자랑을 ..

소토골 일기 2023.06.04

무던하거나 때론 미련하게,

#. 며칠의 비 끝에 밭고랑의 풀들은 맘껏 품 벌려 겨우 제 힘으로 일어서는 작물들을 끌어안을 기세이므로 게으름의 근육을 모두 채근하여 괭이 하나 들고 풀 뽑기, #. 땀방울 방울이 영글어 고른 치열 같은 옥수수 알갱이가 될 것이다. #. 꼼수 없는 성실한 미련, #. 무던하거나 때론 미련하게, #. 지붕과 반자 사이에서 태어 난 꺼뭉이의 새끼들은 밤 눈 어두운 녀석들인지 하필이면 내부장식용 벽 틈새로 빠져 밤 깊은 시간의 SOS, #. 유월 맞이가 제법 소란했다. #. 감자는 꽃을 피우고 고추는 별빛으로도 자라기 시작했으므로 날라리 농사꾼의 밭에도 찰진 초록이 무성 하겠다. #. 농사는 되짚어 보는 일이 아니다 작물도 사람도 함께 자라는 일이다. #. 그러므로 지난해 게으름으로 망친 이런저런 일들은 그..

소토골 일기 2023.06.01

초록비 틈새,

#. 풀숲으로 사라지는 뱀의 꼬리처럼 시간의 숲속으로 가만히 사라지는 오월의 꼬리, #. 종일토록 초록비가 내렸다. #. 모든 물들이 서쪽으로 흐르는 곳을 지나 모든 냇물과 구름이 동쪽으로 흐르는 마을로 들어왔다. #. 허공 가득 등 푸른 비린내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 먼 도시 친구는 둘째 아이 늦은 결혼이 그저 감지덕지하여 이것도 저것도 온통 고맙기만 한데 시끌번쩍한 무대 풍경에는 그저 무심한 채 빼곡한 하객들 모습을 넋없이 바라본다. #. 모두들 평생의 시간을 걸어 걸어 얼굴과 어깨와 온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성실한 세월의 흔적들, #. 구구절절의 주례사가 왜 필요할고? #. 그니들과 손 잡고 눈 맞추어 따듯하게 바라보았으면 됐지, #. 예식이 막 끝날 때쯤 또로록 문자 하나, #. 가슴에 쌓았던 ..

풍경소리 2023.05.29

소만 넋두리,

#. 아침 문안차 공손하게 문 열어 보니 모두 허공의 심장이 되어 떠나고 빈집만 휑하니 남았다. #. 세상이 텅 빈 듯 서운하다. #. 허튼 인사라도 나누고 갈 일이지··· #. 그리고도 다시 도자 장승 안에 여덟 마리, #. 서운한 정 나눌새 없는 숱한 이별들이 가슴속 바람이 된다. #. 하필이면 쥐오줌풀 꽃이라 이름 지었는지 올망졸망한 꽃과 꽃술을 엮은 한 송이 꽃을 보며 연기(緣起)라는 거 오랜 궁구 끝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님을 깨우친다. #. 마당가 백선이 꽃피웠다. 초선의 속눈썹처럼 요염한 꽃술의 모습, #. 오래된 만년필에 잉크를 넣었다. 오랫동안 잊었던 그리운 이에게 엽서 한 장을 써야겠다. #. "그리움조차 꽃으로 피는 계절입니다" #. 작은 씨앗을 뿌려 온 밭이 푸르게 채워졌으니 과연 ..

풍경소리 2023.05.24

오월 냉면은 서울로 간다

#. 공작이 꼬리깃을 펴는 일은 목숨을 거는 행위이다. 구애를 위한 그 짧은 시간 동안 포식자가 나타나도 즉각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 우체통에 새끼를 키우고 있는 작은 딱새는 알이었을 때는 문이 열리면 호로록~ 날아갔지만 부화한 뒤에는 온몸으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 우주보다 더 큰 사랑과 모성 본능, #. 자연은 모든 잉간의 교과서이다. #. 감자를 심은 이후 다시 고추를 심고 옥수수를 심고 이것도 심고 저것도 심고 심고... 하다가 저문 강물에 삽을 씻듯 이제 어둠 속으로 흐르는 샘물에 발을 닦고 집으로 들던 시간, #. 재채기 한 열 번쯤, 그리고 오한과 미열, 콧물과 기침, 온통의 고뿔 증세를 일거에 동원하여 한 밤의 꿈길이 제법 울퉁불퉁하였으므로 해열제와 진통제를 한 사발쯤 마셨으나..

소토골 일기 2023.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