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풍경소리 853

만뢰구적(萬籟俱寂)

#.이제 겨우 여름의 시작일 뿐인데비와 바람에 흔들려 조락한 나뭇잎 하나,무너진 계절에 대한 경고로 받들어 읽는다.#.진료 전 의례적인 인사,편안하셨지요?#.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의료적 절차,#.편안이란,아무 일도 없음이 아닌무슨 일이 생기든해결하거나또는 해결된 상태... 라는 생각,#.주말이라고우르르 모인 아이들은이제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엄마의 노고를 덜어 준다는 명목으로무슨 무슨 맛 집을 찾아 예약하고#.이국어로 버무려진 아주 긴 이름의 음식을꾸역꾸역 먹어대는 일,#.식탁의 키오스크가 허리를 숙이지 않은 오만한 자세로 주문을 받고서빙 로봇이 공손치 않은 몸짓으로 음식을 들고 오는이런 노무 음식점에서 손 맛,사람 맛이 거두어진 한 끼를 먹고는#.밥 값만큼의 차를 마시는 사이음악이 아닌..

풍경소리 2025.06.27

마음만 농부,

#.비가 올 거라고,그리하여비가 온다고몸을 비틀던 옥수수들이불끈 허리를 펴고 있는데#.비는옥수수들만의 축복이 아니라온갖 풀들 조차 머리를 산발한 채 까치발로 일어섰으므로삼천리 잡초 강산,#.어디 어디가 가고 싶다든가무엇 무엇이 먹고 싶다는 류의불쑥아이들을 앞 세운 은근한 강압,#.다만 아이들이 앞장섰다는 것 하나 때문에우리는여지없이 무너진 채극기 훈련 같은 나들이를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산 넘고 물 건너다시 산속의 자리에연당원이란 정원을 만들어 놓고알록달록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아무렇게나 흐드러졌을 들꽃을 몰아낸 자리마다이국의 이름으로 명찰 반듯한 꽃들이이마를 부딪히며 희희낙락하는 곳,#.인공과유위의 공간,#. 오래전 시간,산골의 질박한 삶을 지탱하던쟁기며 소쿠리, 멍석 같은 것들이거..

풍경소리 2025.06.23

제비꼬리 유감,

#.태생적으로 제비꼬리 머리이다.#.부모님께서 만들어 주신 대로 받았으니내 탓은 하나도 없지만사용상의 불편은 오로지 내 몫이다.#.머리를 자르고 난 뒤 열흘쯤이 지날 무렵부터뒤 꼭지 가운데로 모이기 시작하는 제비 꼬리는본인의 불편에 더 해#.보는이로 하여금성실하고 건전한 의식과 방식에도 불구하고제비족으로 의심받을 개연성이 상당히 농후하다는 지레짐작,#.오죽하면아이들 둘을 키우면서얼굴보다 뒤꼭지를 더 자주 보아야 했다.#. 다행히딸 녀석이 제비꼬리인데지지배 머리야 길게 기르면 그만이니딱히 염려 할 일은 아닐테고,#.하여 어느 날 부턴가스스로 이발 가위를 준비해서는#.왼손으로 가늠하고바른 손의 가위로더듬 더듬~셀뿌 커팅,#.고도로 숙련된 이가 이발을 해도맘에 들고 안 들고 할 때가 있는데볼 수 없는 곳을 그..

풍경소리 2025.06.19

꽃잎을 위하여,

#.뻐꾸기 구성지게 울고#.한낮에는문 밖 더운 열기들이거친 숨결로 들이닥치는 날들,#.늦은 걸음으로 오는 산골 계절이지만꽃들 피고 지니,#.유월이 중순으로 익어가는 날 아침,불두화 꽃잎들이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쏟아져 내렸다#.산 중 하릴없는 백수,#.그 꽃잎들손바닥 비로 쓸어본디의 자리에 고이 묻어 주기로 한다.#.순백의 꽃잎들이햇볕에 삭아 말라가는 것을 버려두고 보기에는그 화려함에 대한 무례일 듯도 하거니와#.산골 유월의 며칠을순백으로 밝히던 그 노고에 대한예우이기도 하다. #.주말마다몸 아픈 할머니를 위해 모여드는 아이들은떠난 자리마다내 몸살을 위한 일거리들을 남겨 놓았다.#.기도 하기를아내가 빨리 낫든지아이들이 그만 지치든지...#.마당에 차가 넘치고현관에 신발이 넘치고그늘마져초록 넘치는 날들,

풍경소리 2025.06.10

유월 바람,

#. 유월이 되었다#.풀,풀들,그리고도 또풀,#.새벽 산공기에 섞인환청 같은 뻐꾸기 소리,#.아내가기동을 시작했다.#.밥상이따듯해지기 시작 했다는 것,#.하여시리고 아픈 손가락 관절을 다독이기 위해기꺼이정형외과 행,#. 엑스레이 사진 속손가락 뼈 마디 마다누덕한 세월의 이끼들이 끼어 있었다.#.젊은 의사는"가급적 사용을 금 하라..."고 처방 하였으나가급적 사용을 금 할 수 없는밭과풀과일상들,#.어쨌거나당의정 몇 알의 힘으로 다소 통증을 덜어 낸 손아귀 힘을 모아#.아침 저녁햇살을 피 할 수 있는 두어 시간쯤 풀을 뽑아야 하는 요즘,#.밤 새머리카락 쥐어뜯는 꿈을 꾼다.#.곧 장마가 시작될 텐데그 비 속에 나무도막들을 버려두는 일은어쩐지스테파노를 비 맞히는 일인 듯하여#. 쌓아 놓은 10톤가량의 통나무들..

풍경소리 2025.06.05

불쑥 ☎ 하기를,

☎ 1,스테파노였다.어느 어느 산속 토목공사 현장에서참나무 5톤 가량을 차에 실어 놨는데내가 일 끝내고 가져갈까요? 가지러 오실래요?그는자기 일을 하는 중에도남의 필요에 의한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상황을 읽는다.병이다.다시 얘기하건대신세를 지는 게 아니라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그리하여5월의 며칠을이른 겨울 준비로 탕진 중,☎ 2,이웃 도시에 사는 친구의 불쑥 전화,- 뭐 해?- 전화받고 있다네· · ·☎ 3,어느 낯 선 사람의 전화,- 누구누구시지요?- 아닙니다. 잘못 걸으셨어요끊으며 전화기 너머로 들려 오는 소리,- 잘 못 걸려 온 전화 뭣 하러 받는댜? · · ·갑자기전화 멀미 1인분,☎ 4,며칠 동안휴대전화가 먹통의 고장 증세를 보였으므로유선 전화로 전화를 한 친구,뭐시가 바쁜지'내가 금방 다시 ..

풍경소리 2025.05.25

며느리 밥상,

#.산골 새벽은 여전히 겨울과 내통 하였으므로오늘 아침 또서리가 내렸다.#.그런 속에서도꽃이 피고 연두의 잎이 솟고,#. 주말 시간에 잠깐아내는 집으로 돌아왔다.#.결국며느리가 급히 내려와 세끼의 밥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어설프고낯 선 중에도기꺼운 맛,#. 먼 곳에 있는 사람들... 정도였는데일체 된 가족애를 느낀다.#. 지난해처럼앞 마을 아우가 커다란 트랙터를 끌고 올라와서아래 윗 밭 속살을 곱게도 갈아 놓았다#.아내 입원 후농사 일들은온통 홀로의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안도하기는푸르게 일어서는 새 순들처럼아내도 푸르게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어떻게든고쳐 쓰기로...

풍경소리 2025.04.27

기습적 계절,

된서리 내린 다음 날,기습적으로 여름이 되었다오들오들 떨던 꽃들은작은 바람에도 잎을 떨구었으므로산골 누옥의 뜨락엔여전히 향기 싱싱한 꽃잎들이아무렇게나 누워 웅성거리고그 틈새농기계에 얻어맞은 옆구리를 끌어안고작은 병원을 찾았더니만맘 놓고 엑스레이팡 팡 팡뤤트겐 사진 속의 나는이미 형해가 분리된 저승의 몸으로구부정한 통증을 끌어안고 있었다산에는들에는온통 연두 연두 소란하건만스멀스멀 낡은 몸을 갉아대는이런저런 통증들봄이몸이아프다.

풍경소리 2025.04.19

감자를 위하여

#.밖에서 식사를 하게 될 경우, 식탁에 감자 반찬이 놓일 때면어김없이 주인에게 얘기 했었다.- 강원도 사람에게 감자 먹이는 건 실례입니다-#.그럼에도날 풀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감자를 놓는 일이다.#.겨우 내 푸석하게 메말랐던 땅의 속살을 뒤집어공손하게 씨 감자를 넣는 일,#.제 몸을 조각 지어야비로소 통감자로 거두어지는 감자의 일은#.곤비한 몸으로도기어이생명을 길러내는세상의 어머니 같아 숙연하다.#.이번 감자를 넣는 일에는자발적 응원군이 있다.정우 정환이가 팔을 걷어 부친 것,그래봤자 군일만 하나 더^^#. 4월이 되었는데도아침마다 서리 내려서한낮의 시간 변덕 같은 햇살에 홀린 작은 꽃망울들은 제 색으로 화들짝 피기도 전에누런 색으로 절명해 버렸으니#.차라리 여름 같은 늙은 봄이 늘어질 때까지꽃도사..

풍경소리 2025.04.03

추운 삼월,

#.낮 동안 비워 두었던 산속 누옥에지난해 주문했던 비료 포대가 쌓여 있고#.이제 목에 둘러도 좋을 만큼사뭇 부드러워진 바람결에쌓였던 눈도 녹아 내리는데#.벽에 걸려 있는달력 한장을똑떼어내니#.3월이 되는 날부터다시 눈 소식,#.하여춘삼월은 또추운 삼월의 줄임 말이다.#.마을 안에서는농사일 시작 전에 관광을 다녀와야 한다고이구동성 왈가왈부 하였으므로손 없는 날을 잡아 기어이 한바탕 난리를 겪어야 하는#.내겐 여전히극기훈련,#.겨우내 안부가 궁금하던 산새들이봄의 척후처럼 나타나추녀 끝을 기웃거리는 날들,#.봄이 온다는풍문만 무성하다가어느 날 불쑥메뚜기 이마빡 만한 산골 마당에 쇠잔한 기색이 역력한 늙은 봄을 만나곤 했었으니올 해도 예외 없는 상황이 되겠지만#.어쨌든 봄,#.산골 누옥의 뜨락을 정갈하게 닦고..

풍경소리 2025.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