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풍경소리 847

없그레이드,

#.새벽 청량한 바람에 꽃 피운 백선의 모습이참 요염도 하다.#.아주 가끔이런저런 옷가지들을 가방 가득 싣고 내려오는 아이들,철이 지나고유행에 맞지 않는다며 작업복으로 쓰시라는 배려?#.그리하여 즈이들 옷매무새는 업그레이드 하고내 꼴은 자꾸 없그레이드 되는천생 마당쇠 패션,#.늘 그랬듯이장모님 기일을 택해 처가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내의 살짝 들뜬 모습,젊어서도 늙어서도친정은 여전히어머니로 존재하는 것인지,#.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셨던 등 굽은 시간 위에 얹혀사는 것,기어이 아픈 형제가 있어불참의 가슴 구멍을 만들어낸다.#.결혼 무렵에는하염없이 덜컹이며 다녔던 비포장의 친정 가는 길은#.내비게이션조차 혼돈스러울 지경으로새로운 길들이 많아졌음에도길은 예전보다 더 밀리고 어지러..

풍경소리 2024.05.17

늙은 고양이를 위하여,

#. 늙은 친구와 둘이먼 동쪽 바닷가 찻집에 앉아오래도록 차 한잔을 마셨다.#.그와는 따로 말을 나누지 않아도같이 있는 것 만으로 충분한 대화가 된다.#.반팔 티에배꼽을 내놓은 아이들 조차 추워 보이지 않는 날씨임에도우리는지나치게 두꺼운 옷을 입고지나치게 과묵한 시간을 끌어안고 있었다#.바다와 하늘의 딱 한가운데 누워 있는 수평선처럼이승과 저승의 경계선 같은 오늘을 다독거리고멀게 지나가 버린 시간의 언어들로내일의 절망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바다를 떠나 설악에 들고나는 감자와 옥수수와 온갖 작물들과 풀들과이제 막 극성을 떨기 시작한 다섯 마리의 강아지와지난달 귀촌한 늙은 고양이의 집을 짓기 위하여조금씩 그러나 아주 왕성하게 풀 밭이 되어 가는산골짜기로 돌아왔다.#.노란 송홧가루가 날리기 ..

풍경소리 2024.05.02

봄, 강아지,

#. 음지에는 여전히 잔설이 옹크려 있고 산골 누옥의 마당에는 꼬마회오리가 어지러운데 여린 햇볕을 공손히 받들어 냇가의 버들강아지 눈을 떴다. #. 우수 경칩이 지났으니 당연히 봄으로 가는 길 이건만 이런저런 봄 조짐들 앞에 그저 또 놀랍고 감사한 산골짜기, #. 정우는 4학년이 되고 정환이는 1학년이 되었다. #. 대견하고 경이로운 아이들의 시간 뒤에서 나는 바람 같은 세월에 덜미 잡혀 무럭무럭 늙어가고 있다. #. 혼자 비닐하우스 두 동을 정리하는 일, 간간히 산짐승이 지날 뿐인 진공의 적막 속에서 자주 쉬며 간혹 노래했다. #. 발악도 음악이 되는 적막의 긍휼, #. 지난 해와 크게 다르지 않게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온몸을 붉고 맵게 물들일 고추를 심어 먼 곳에 사는 지친들과 나누는 일, #. 시골..

풍경소리 2024.03.07

척사(擲柶)로 척사(斥邪),

#. 마을에 신발 있는 사람 모두 모여 윷놀이 한판, #. 겨우내 지붕 낮은 집안의 칩거를 떨치고 #. 추운 바람 아랑곳없이 모두들 아지랑이처럼 일어서 서 덩실 춤 한판, #. 평균 연령 70대, 많이 모일수록 평균 연령이 높아지는 이상하고 누덕진 세월, #.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마저 작은 바람에 조차 삐그덕 관절 통증을 쏟아 냈다. #. 우수 지나 경칩이 코 앞 이건만 #. 창 안에는 봄 꽃 창 밖에는 눈 꽃 #. 이제 다시 모난 돌이 지천인 산골짜기 작은 밭을 깨워야겠다.

풍경소리 2024.03.03

영농 결의 대회,

#. 동쪽 마을은 눈덩이의 피폭이었다. #. 하여 고성까지 올라가 주유(周遊)하리라는 당초 계획은 동로(凍路) 아미타불, 건봉사 입구에서 차를 돌렸다. #. 당초 계획의 차질로 시간 벌이를 한 덕분에 푸른 파도를 넘나들던 등 푸른 생명들만 더하기로 제 살을 베어야 했다 #. 푸른 하늘 한 잔, 너른 바다 한 점, #. 하늘은 여전히 파란 눈덩이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어디를 보든 눈 부시고 어디를 가든 눈 시렸다. #. 술 취한 이들이 마을 관광을 마을 강간으로 발음할 때쯤 #. 메들리 오두방정으로 멀미를 일으키던 버스는 우리 모두가 사는 지붕 낮은 집들의 마을에 도착했으므로 #. 소금 맞은 미꾸라지처럼 들 뛰던 우리 모두 봄철 농사 준비 끝,

풍경소리 2024.02.25

갈쑤록 태설(太雪)

#. 입성 고운 아나운서가 확률 60%의 눈을 예고하던 저녁, #. 하늘은 마지막 한 방을 준비했는지, #. 낮 동안 시작한 비와 눈을 밤 새 발목이 묻히도록 쌓아 놓은 채 날 밝을 시간엔 시치미 똑 뗀 채 그쳐 있었다. #. 쓸기를 포기하고 넉가래로 밀고 긁어야 하는 노고, #. 우수가 저 멀리 지나쳐 있으니 올봄은 또 난산이다. #. 그럼에도 남녘에서 들려오는 알록달록의 꽃 소식, #. 마침 앞마을 아우의 고추 싹이 돋았노라는 기별이니 아지랑이 보다 먼저 일어서 서 겨우내 묵혀 두었던 비닐하우스를 손질해야겠다.

풍경소리 2024.02.22

시나브로 봄,

#. 몇 차례 불규칙한 혈압과 맥박의 요동으로 병원 응급실을 들락여야 했다. #. 전체적으로 사용년수 도래에 따른 마모증세인 것 같다. 이쯤이면 병원엘 갈 것 없이 천수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 오랫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에서 이제는 세상에 계시지 아니한 친구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그도 나도 이젠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세월을 사는 건가 보다. #. 고개 넘어 소도시에 지점을 개설한 후배가 또 일주일에 이틀의 시간으로 나를 도와주십사의 읍소가 있었으나 이제 다시는 내 남은 시간을 굴종의 시간으로 만들지 않겠노라는 퇴직 시의 결의를 다짐하고 다짐하여 기어이 고사, #. 산 깊은 곳에 들어앉은 음식점에 앉아 무슨 맛으로 무얼 먹는지 모르는 음식들을 꾸역꾸역 먹었다. #. 집 안 조리 기구에 ..

풍경소리 2024.02.08

사람 포근 마을,

#.마을 일에 발 들여놓은 뒤부터이런저런 사람의 일로백수의 일상이 조금 번잡해지기 시작했다.#. 기어이마을 규정을 고쳐야 한다는 여러 의견에 멱살 잡혀부수고 새로 짓기를 여러 날,#.주민 모두에게 내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자꾸자꾸고치고 덧 붙이기를 하는 대신기어이이놈의 규정을 없애 버리는 날이 와야 한다고말했다.#.다분히 정치색으로 느껴지는화합과 친목을 없애 버린 뒤그저 웃자고매년 끄트머리에는 주민 모두 대동단결하여 사다리 타기를 한 끝에사다리 제일 꼭대기에 이른 사람에게푸짐한 상품을 주자고 쌩고집하여 관철하기에 이르렀다.#.어느 의심 많은 이가연세 많으신 할아버지에게 좋은 상품이 뭐가 있겠느냐는 의문에아주 간단히"정력 빤쓰"를 얘기했으므로곧마을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했다.#.사람에 의해 굴레 지어지는 것들..

풍경소리 2024.01.30

봄 기다림,

#. 네팔을 떠돌고 있는 이들이 꾸샤풀(吉詳草)로 만든 방석 위에 석가모니처럼 앉아 해맑은 얼굴의 사진을 보내고 산골엔 또 눈이 내리고 나는 우익지욱이 쓴 오래 전의 주역선해를 읽고, #. 그리고 눈 부시지 않은 새벽이 왔다. #. 그럭저럭 새 해 첫 달도 어느새 하순의 날들, #. 춥다가 덥다가 눈이 오다가 맑기를 두서없이 반복하던 아득한 허공에 다시 바람이 일고 낯 선 발자국 소리로 눈이 내린다. #. 깡총 소한도 대한도 건너뛰었으니 이제 곧 입춘, #. 그렇게 봄이 온다는데 나는 또 무엇을 하고 누구를 기다려야 하나 #. 겨우내 게을렀던 손을 정갈하게 씻고 공손하게 먹 갈고 붓 들어 입춘첩 몇 장을 쓰고자 한다. #. 입춘대낄 하여 그냥다정 하고자,

풍경소리 2024.01.22

겨울 연가,

#. '주역은 미신 아닌가요?' '태극기를 보고 경례는 하시나요?' '그럼요 우리나라 국기인데요' '다음부턴 하지 마세요 주역 덩어리입니다' #. 많지 않은 주민 의견을 묵살한 채 멋대로 전횡을 일삼던 대동회 몇 사람에게 일을 할 줄 모르거든 정직하기라도 하라...는 호통 끝에 마을 대동회장 일을 끌어 안음으로써 내 발등을 찍었다. #. 예보된 기온은 -10℃ 산골짜기 인심으로 예보된 기온에 4~5℃쯤을 덤으로 얹어 두었을 터이니 온도계는 보나 마나 얼어 죽었을게다. #. 아주 오래 전의 햇볕이 밤새 성냥갑 만한 난로에서 올올이 풀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옛날 또 옛날 따듯한 나무들의 말씀을 덮어 추운 한 밤을 징검징검 건넜다. #. 이 겨울 풍찬노숙 중인 두 마리 강아지 안부가 궁금하여 내다보니 지난밤 추위..

풍경소리 202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