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풍경소리 825

눈 쓸어 득도하다.

#. 밤 새 눈 내린 뒤 하늘은 시침이 똑 뗀 채 정지한 듯 푸르러서 진공의 허공에 가느다란 철사줄을 휘두르면 쨍그랑 깨질 것 같은 산골 아침, #. 도시에서 느끼던 소란하고 끈적한 추위가 아닌 명료하고 청량한 산골 추위, #. 추위는 투명하게 전도된다. #. 올 겨울 들어 처음 사용 탓인지 송풍기 시동으로 잠시 용을 썼더니 손바닥에 대번 물집이 잡히고도 아릿한 통증, #. 백수의 손이 참 까탈도 많다. #. 도회 형제의 일로 하룻 밤 이틀 낮 동안 집 비운 사이 집안으로 잠입한 고양이 두 마리가 구석에 모아 두었던 습자 뭉치를 헤집어 놓은 채 찢고 뭉개고··· #.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두 손 들고 무릎 끓려 앉혀 놓고는 반성문 열장쯤 받으려 했으나 요놈들 짐짓 모른척 즈이덜끼리 시시덕 장난질, #. ..

풍경소리 2022.12.15

12월의 가벼움,

#. 입동 지나고 소설도 지났지만 어쨌든 첫눈이 내려야 겨울이다. #. 하늘 깊이에서 그리웠던 이의 엽서 같은 눈이 내리면 아직도 설렐 수 있다는 것, 잠시 또 메말랐던 가슴이 촉촉해지고 #. 저 아랫 집에서 넉가래로 눈 치우는 소리가 이승의 가장 낮은 바닥을 긁는 것 처럼 갈비뼈 사이로 들려오면 산골짜기 적막한 겨울이 시작되는 거다. #. 정우와 정환이는 당초 1박 2일의 계약 사항을 2박 3일로 변경한 채 점령군 처럼 몰려왔었다. #. 아이들은 우리를 참 많이 움직이게 했다. 밥 줘 목말라 호떡 먹고 싶어 술래잡기 놀이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워쩐 싸움 놀이에 말타기와 오만가지 에트쎄더러, #. 나는 기진과 동시에 맥진 증세, #. 저녁 잠자리에서 두 아이가 말했다 - 할머니 내일은 차돌박이..

풍경소리 2022.11.30

고라니 배추,

#. 초저녁에 잠들어 세 번의 마디로 깨기를 반복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 난 시간, #. 미명의 세시쯤이었고 창가의 감자, 제주의 하르방 그리고 어린양 한 마리가 낮은 스탠드 불빛에 선하품을 쏟아낸다. #. 器物조차 氣物이 되는 시간이다. #. 논어부터 노자와 장자와 성서와 주역과 금강경이 모두 한 목소리로 같은 곳을 향해 가자는데 사람들이 저 마다 이 길이 맞네 저 길이 옳네 왈가왈부하고 있을 뿐, #. 그렇게 새벽에 잠 깨어 두 시간여, 이제 동창이 밝을 모양이니 책 덮고 쌀 씻어야겠다. #. 고라니가 남겨 둔 배추 아홉포기를 거두었다. 300 모종을 심어 아홉을 거두었으니 황송하기 그지 없다. #. 평상시 같으면 밭에 버려졌을 볼품새 없는 배추 마져 기꺼이 거두었으니 이 또한 고라니 은덕이다. #...

풍경소리 2022.11.26

소설 雨,

#. 김장 끝나고 이런저런 뒷 일을 대략 정리한 날부터 오래 덮어 두었던 책을 펼쳐 들고는 3일 만에 다섯 권, #. 눈에 박힌 활자들이 모래알처럼 껄끄러우니 눈 들어 사물을 보는 일이 온통 고행이다. #. 무릇 때를 가려해야 하는 일들을 억지 부린 결과이다. #. 추울 때 까지만으로 선을 정한 바깥 설거지는 도대체 추워지지 않는 날씨 탓에 오늘도 여전히 발등 찍는 일이 되었다. #. 하느님 지금이라도 빨리 추워져야지 주부 습진을 떨칠 수 있사옵니다~ #. 딸이 제안했다. 한 달에 딱 한번 아이들을 맡아주면 즈이 부부끼리 1박의 여행을 다녀올 수 있어 주중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해소할 수 있을 거라고, #. 내 대답, 너희들로부터 해소된 스트레스 우리에겐 스텐레스로 쌓일 거다. #. 나무들 제 몸의 잎을 ..

풍경소리 2022.11.23

어쩌다 증조,

#. 손 윗 동서의 큰 아이가 대학을 다니던 중 결혼했고 다시, 그 아이의 아이가 대학 졸업 전 장가를 가서는 지난주에 아이를 낳았으므로 어쩌다 증조가 되는 왕뻘쭘 상황이 빚어졌다. #. 그러나 나는 좀 괜찮다. 결혼 늦게 한 막내 처제의 아이들은 시집 장가도 안 간 새파란 청춘들이 어느날 문득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으므로, #. 백두가 집에서 나와 낙엽 수북한 곳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낭만 좀 아는 똥개, #. 늦가을 인색한 햇볕에 몸을 뒤척이던 마지막 고추는 결국 건조기로 들어갔다. 진작 이럴 것이지... 의 잔소리를 빠뜨리지 않는 아내의 내공, #. 김장을 했고 김장 뒤의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정리했고 했고 하고 또 하였으므로 이제 약 취한 바퀴벌레처럼 발라당 드러누워 쉴 수 있어야 마땅한 일..

풍경소리 2022.11.15

가을 박제,

#. 연일 서리의 강습, 시들어 가는 꽃송이를 화병에 담아 식탁에 놓아두는 일로 내 기억의 갈피에 또 한 번의 가을이 있었음을 나이테로 둘러둔다. #. 가만히 생각해보니 백수가 무었 때문에 어두운 새벽 길에 운동을 나서야 하나? 추운 날의 새벽 운동 이거 상당히 신경 써야 되는 일이다. 말하자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중무장을 한 뒤에야 집 나서기가 가능하다는 것, 어둡기는 또 어떻고, #. 하여 점심 전 시간으로 바꿨더니만 햇볕은 따사롭지요 산길은 상쾌 하지요 보이는 사방이 알록달록 단풍빛이지요 #. 이 버릇 하나 고치는데 근 30년, #. 급행열차가 거만하게 지나가던 산골의 철길이 폐선된 뒤 시골마을 곳곳의 허공이 열리고 있으니 실개천과 어울어진 또 다른 개천(開天)이다 #. 통행 제한 높이 ♣.♠m..

풍경소리 2022.10.26

가을 연가,

#. 처음, 설거지를 시작 했을 때 아내는 거듭 고마워했었다. #. 한 달쯤이 지난 지금, 그릇을 씻을 때 곡면 부분과 오목한 부분을 조금 더 신경 써서 닦아라 씻은 그릇은 엎어 놓아야 물기가 빨리 마른다... 등 등의 비급을 전수하는 일로 직접 설거지하실 때 보다 훠얼씬 바쁘시도다. #. 어떻게 사람의 일이 요다지도 쉽게 뒤집어 질 수 있을까? #. 사주팔자에 나와 있던 일이었을까? #. 전화 통화 이거나 영상을 통한 친구넘들의 술주정도 고역 이건만 어제는 이웃 도시에 사는 아우 녀석이 회갑을 맞아 댓병 딱 한 병만 마셨노라고 꼬부라진 혀를 통해 팔다리가 몽땅 잘려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의 주정을 주장으로 늘어 놓았다. #.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로 마시고 취해서 주정하며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겠다..

풍경소리 2022.10.11

눈을 위한 말투,

#. 비 그치기를 목 빼어 기다리던 8월의 서른 하루, #. 손 흔들어 보내야 할 끝날에 조차 씻김굿 같은 비가 내린다. #. 이제 그만 내 글씨를 쓰리라고 집안에 들어앉은 한 달새 파지만 수북하다. #. 누군가 그랬었다. 남자의 손으로 여자의 글씨를 쓴다고, #. 쓰고 있는 붓이 여성용 인가?^^ #. 아무리 써 봐도 써 놓은 글씨가 맘에 들지 않으니 병 중의 병이다. #. 앞 선 이들의 글씨를 흉내내기보다는 이제 내 손으로 내 글씨를 써야겠다. #. 눈으로 들을 수 있는 말투를 위해, #. 다듬고 또 다듬어봐도 #. 파지 또 파지, #. 그렇거니 또, #. 변변찮은 재주에 끈기라도 있어야지, #. 팔월이 다 젖도록 내린 비는 팔월 건너 구월의 날들까지 질척하게 이어질 모양이다. #. 하늘이 조금 가벼..

풍경소리 2022.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