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풍경소리 825

봄, 강아지,

#. 음지에는 여전히 잔설이 옹크려 있고 산골 누옥의 마당에는 꼬마회오리가 어지러운데 여린 햇볕을 공손히 받들어 냇가의 버들강아지 눈을 떴다. #. 우수 경칩이 지났으니 당연히 봄으로 가는 길 이건만 이런저런 봄 조짐들 앞에 그저 또 놀랍고 감사한 산골짜기, #. 정우는 4학년이 되고 정환이는 1학년이 되었다. #. 대견하고 경이로운 아이들의 시간 뒤에서 나는 바람 같은 세월에 덜미 잡혀 무럭무럭 늙어가고 있다. #. 혼자 비닐하우스 두 동을 정리하는 일, 간간히 산짐승이 지날 뿐인 진공의 적막 속에서 자주 쉬며 간혹 노래했다. #. 발악도 음악이 되는 적막의 긍휼, #. 지난 해와 크게 다르지 않게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온몸을 붉고 맵게 물들일 고추를 심어 먼 곳에 사는 지친들과 나누는 일, #. 시골..

풍경소리 2024.03.07

척사(擲柶)로 척사(斥邪),

#. 마을에 신발 있는 사람 모두 모여 윷놀이 한판, #. 겨우내 지붕 낮은 집안의 칩거를 떨치고 #. 추운 바람 아랑곳없이 모두들 아지랑이처럼 일어서 서 덩실 춤 한판, #. 평균 연령 70대, 많이 모일수록 평균 연령이 높아지는 이상하고 누덕진 세월, #.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마저 작은 바람에 조차 삐그덕 관절 통증을 쏟아 냈다. #. 우수 지나 경칩이 코 앞 이건만 #. 창 안에는 봄 꽃 창 밖에는 눈 꽃 #. 이제 다시 모난 돌이 지천인 산골짜기 작은 밭을 깨워야겠다.

풍경소리 2024.03.03

영농 결의 대회,

#. 동쪽 마을은 눈덩이의 피폭이었다. #. 하여 고성까지 올라가 주유(周遊)하리라는 당초 계획은 동로(凍路) 아미타불, 건봉사 입구에서 차를 돌렸다. #. 당초 계획의 차질로 시간 벌이를 한 덕분에 푸른 파도를 넘나들던 등 푸른 생명들만 더하기로 제 살을 베어야 했다 #. 푸른 하늘 한 잔, 너른 바다 한 점, #. 하늘은 여전히 파란 눈덩이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어디를 보든 눈 부시고 어디를 가든 눈 시렸다. #. 술 취한 이들이 마을 관광을 마을 강간으로 발음할 때쯤 #. 메들리 오두방정으로 멀미를 일으키던 버스는 우리 모두가 사는 지붕 낮은 집들의 마을에 도착했으므로 #. 소금 맞은 미꾸라지처럼 들 뛰던 우리 모두 봄철 농사 준비 끝,

풍경소리 2024.02.25

갈쑤록 태설(太雪)

#. 입성 고운 아나운서가 확률 60%의 눈을 예고하던 저녁, #. 하늘은 마지막 한 방을 준비했는지, #. 낮 동안 시작한 비와 눈을 밤 새 발목이 묻히도록 쌓아 놓은 채 날 밝을 시간엔 시치미 똑 뗀 채 그쳐 있었다. #. 쓸기를 포기하고 넉가래로 밀고 긁어야 하는 노고, #. 우수가 저 멀리 지나쳐 있으니 올봄은 또 난산이다. #. 그럼에도 남녘에서 들려오는 알록달록의 꽃 소식, #. 마침 앞마을 아우의 고추 싹이 돋았노라는 기별이니 아지랑이 보다 먼저 일어서 서 겨우내 묵혀 두었던 비닐하우스를 손질해야겠다.

풍경소리 2024.02.22

시나브로 봄,

#. 몇 차례 불규칙한 혈압과 맥박의 요동으로 병원 응급실을 들락여야 했다. #. 전체적으로 사용년수 도래에 따른 마모증세인 것 같다. 이쯤이면 병원엘 갈 것 없이 천수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 오랫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에서 이제는 세상에 계시지 아니한 친구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그도 나도 이젠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세월을 사는 건가 보다. #. 고개 넘어 소도시에 지점을 개설한 후배가 또 일주일에 이틀의 시간으로 나를 도와주십사의 읍소가 있었으나 이제 다시는 내 남은 시간을 굴종의 시간으로 만들지 않겠노라는 퇴직 시의 결의를 다짐하고 다짐하여 기어이 고사, #. 산 깊은 곳에 들어앉은 음식점에 앉아 무슨 맛으로 무얼 먹는지 모르는 음식들을 꾸역꾸역 먹었다. #. 집 안 조리 기구에 ..

풍경소리 2024.02.08

사람 포근 마을,

#. 마을 일에 발 들여놓은 뒤부터 이런저런 사람의 일로 백수의 일상이 조금 번잡해지기 시작했다. #. 기어이 마을 규정을 고쳐야 한다는 여러 의견에 멱살 잡혀 부수고 새로 짓기를 여러 날, #. 주민 모두에게 내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자꾸자꾸 고치고 덧 붙이기를 하는 대신 기어이 이놈의 규정을 없애 버리는 날이 와야 한다고 말했다. #. 다분히 정치색으로 느껴지는 화합과 친목을 없애 버린 뒤 그저 웃자고 매년 끄트머리에는 주민 모두 대동단결하여 사다리 타기를 한 끝에 사다리 제일 꼭대기에 이른 사람에게 푸짐한 상품을 주자고 쌩고집하여 관철하기에 이르렀다. #. 어느 의심 많은 이가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에게 좋은 상품이 뭐가 있겠느냐는 의문에 아주 간단히 "정력 빤쓰"를 얘기했으므로 곧 마을에서 추방될 ..

풍경소리 2024.01.30

봄 기다림,

#. 네팔을 떠돌고 있는 이들이 꾸샤풀(吉詳草)로 만든 방석 위에 석가모니처럼 앉아 해맑은 얼굴의 사진을 보내고 산골엔 또 눈이 내리고 나는 우익지욱이 쓴 오래 전의 주역선해를 읽고, #. 그리고 눈 부시지 않은 새벽이 왔다. #. 그럭저럭 새 해 첫 달도 어느새 하순의 날들, #. 춥다가 덥다가 눈이 오다가 맑기를 두서없이 반복하던 아득한 허공에 다시 바람이 일고 낯 선 발자국 소리로 눈이 내린다. #. 깡총 소한도 대한도 건너뛰었으니 이제 곧 입춘, #. 그렇게 봄이 온다는데 나는 또 무엇을 하고 누구를 기다려야 하나 #. 겨우내 게을렀던 손을 정갈하게 씻고 공손하게 먹 갈고 붓 들어 입춘첩 몇 장을 쓰고자 한다. #. 입춘대낄 하여 그냥다정 하고자,

풍경소리 2024.01.22

겨울 연가,

#. '주역은 미신 아닌가요?' '태극기를 보고 경례는 하시나요?' '그럼요 우리나라 국기인데요' '다음부턴 하지 마세요 주역 덩어리입니다' #. 많지 않은 주민 의견을 묵살한 채 멋대로 전횡을 일삼던 대동회 몇 사람에게 일을 할 줄 모르거든 정직하기라도 하라...는 호통 끝에 마을 대동회장 일을 끌어 안음으로써 내 발등을 찍었다. #. 예보된 기온은 -10℃ 산골짜기 인심으로 예보된 기온에 4~5℃쯤을 덤으로 얹어 두었을 터이니 온도계는 보나 마나 얼어 죽었을게다. #. 아주 오래 전의 햇볕이 밤새 성냥갑 만한 난로에서 올올이 풀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옛날 또 옛날 따듯한 나무들의 말씀을 덮어 추운 한 밤을 징검징검 건넜다. #. 이 겨울 풍찬노숙 중인 두 마리 강아지 안부가 궁금하여 내다보니 지난밤 추위..

풍경소리 2023.12.29

치명적 짝사랑,

#. 산 길 걷기 한 시간쯤 밖으로는 땀이 나고 안에서는 겁이 나는 이상하고 따듯한 겨울, #. 사회적 고자질 정도를 기사라고 이름하여 온갖 것들이 왈가왈부한 기후 위기 경고는 이제 경고의 선을 넘은 코 앞의 일이다. #. 그리하여 대설이 지난 날 산꼬댕이 조차 영상 18℃, #. 개구리 나오고 새싹 돋을라· · · #. 정우가 한자급수시험을 본다고 여러 날 책에 매달려 몸살을 하더니만 100점 합격을 축하 한다고 케잌에 더불어 준비한 바깥 음식 자리, #. 돈 쓰고 기꺼이 박수 쳐 주어야 하는 백수의 자발적 손재수, 그 치명적 짝사랑,

풍경소리 2023.12.14

從吾所好,

#. 겨울이다. 일거리를 만들어 판을 벌이기 전에는 일이 없다. 허긴 이제 일이 있어도 할 수 조차 없다. 날마다 서리 내리고 얼음이 얼고 그리고 모서리 날카로운 골짜기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구들방조차 나무를 하기도 장작을 만들기도 힘이 드는 것은 물론 날마다 때마다 숙제하듯 불을 넣는 일에도 심드렁하여 따개비처럼 거실 한켠에 붙어 맘 놓고 게으른 채 겨울을 나는 중이다. #. 이 겨울에 산골을 찾아온 이가 더듬더듬 나이를 물었으나 성의 없는 대답, '해마다 바뀌는 걸 어찌 다 기억하누...'였다. #. 이 마을 들어산지 어언 서른 해가 되어가니 이때쯤이면 마을 안에 감투들이 허공에 난무하여 그 노무 완장이 돌고 돌아 내게도 권유하는 이가 있으나 그저 무심한 듯 고사하기, 그럼에도 어쩐지 뭔가를..

풍경소리 2023.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