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860

김장 후,

#. 김장은 이제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이다. #. 따라서 김치도 필수가 아닌 선택의 식품이다. #. 고춧가루와 양념들로 화장을 마친 배추들은 땅속에 묻힌 항아리가 아닌 김치냉장고에 모두 수감되었다. #. 그리고 동치미 대파 김치 섞박지... 등 등, #. 김장을 하는 이도 김장을 돕는 나도 서로의 고단한 몸이 소금에 절은 배추보다 더 무겁다. #. 내년엔 우리도 김치 사 먹기로... 마음먹었다. #. 이박삼일 동안 정비 공장에 누워 있던 차를 찾으러 가는 시간, 시골 버스 안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만 가득 흔들리고 11월의 몇 날들이 서툴게 춥고, #. 초로의 여인네 둘이서 햇살보다 더 끈적한 수다를 늘어놓는 끄트머리 "뭘 먹어야 아픈데 읎이 오래 산대유?..." #. 뱀에게 불로초를 빼앗긴 길가메시의..

소토골 일기 2022.11.10 (18)

함께 가는 길,

#. 바람처럼 시월이 비워졌다. #. 달력은 헐렁하고 세월은 묵직하고 #. 나뭇잎들이 허공에서 쏟아져 내려 보도의 삭막을 점묘하고 있었다. #. 그걸 한사코 사진에 담겠다고 발걸음 멈춘 채 이리 째려보고 저리 찍어 보고 #. 새로 정한 걷기의 산길은 가을의 사타구니로 향해 있었다 #. 아이의 돌날, 하루 전 시간을 여벌로 얹어 손 윗 동서 댁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아침상 준비 과정이 이채롭다. #. 처형이 달걀을 꺼내면 동서는 프라이팬을 대령하고 고기를 꺼내면 칼과 도마를 대령하고 #. 입 속의 혀 처럼 혀 끝의 꿀 처럼, #. "···떨어진 은행나무 잎은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이라고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내뱉은 요절한 시인의 구시렁 때문인지 가로 청소원이 아주 힘센 송풍기로 나무 아래의 낙엽..

소토골 일기 2022.10.30 (22)

이모티콘에 대하여,

#. 참 독하기도 하지, 며칠의 서리로 주변의 푸르렀던 잎들 모두 주저앉았건만 이 맘 때 쯤에야 향기 가득한 꽃으로 피는 들국화, #. 이제 제법 겨울 준비가 된 듯하여 그만 좀 누워야겠다... 마음먹을 때쯤 김장할 때 써야 할 바깥 수도가 덜커덕 고장이 나서 허리가 얼큰하도록 삽질하는 동안 머리, 어깨 위로 깃털처럼 가볍게 뛰어내리던 나뭇잎들, #. 가을은 깊고 통증도 깊고녀~ #. 외할머니 품에서 키워진 예온이는 갖은 아양과 굴종에도 불구하고 그저 멀뚱 새침하다. #. 아이 돌잔치를 정리하는 시간, 아이의 외할머니께 정중히 인사했다, "아이들 키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 처가 밀착도가 더 큰 아이들이 외가 친밀도가 훨씬 더 큰 아이들로 키우는 일, 장차 이 세상은 모계 중심으..

소토골 일기 2022.10.24 (22)

훈수의 결과,

#. 왜 엄마 아빠는 내 생일날 결혼했어? #. 정환이의 생일과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 겹친 날, 정환이의 도치된 의문, #. 케잌에 선물에 깍두기로 정우까지, #. 털리고도 기꺼운 행복, 뽀뽀 수천만 번, #. 지난봄 스테파노의 훈수가 있었다. 옥수수 심는 사이사이 고구마 싹을 꽂아 놓으면 옥수수 베고 난 뒤에 뒷 산 덩치만 한 고구마들이 줄줄이 달릴 거라는··· #. 쇠스랑과 호미질 수천만 번, 나온 고구마 달랑 아홉 개 쯤, 크기는 빈대 콧구멍 만한 것들이 출토 되었다. #. 사은품으로 고구마 줄기만 수레 가득, #. 스테파노와 친구 끊기를 해야겠다. #. 낡아가는 집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문제들 중에 가장 큰 골칫거리 하나, #. 지난해부터 마당에 설치된 바깥 등 어디에선가 누전이 진행되어 늦은..

소토골 일기 2022.10.14 (30)

새벽 수다,

#. 하늘엔 구름이 흐르고 덩달아 세월도 흐르고, #. 하늘은 참 맑았고 허공은 또 셀로판지처럼 투명하다. #. 주머니마다 도토리 이거나 밤 몇 톨이 들어 있어도 좋은 시월, #. 하수관 청소 이후 도미노처럼 이 일 저 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 싱크대를 교체하고 윗부분의 전등갓을 바꾼 뒤 다시 조리대 위에 전등 늘여 달기, #. 지난해 집안 난로를 바꾼 뒤 연통을 새로 설치하는 바람에 지붕을 수직 관통한 연통을 철거하는 일, #. 연통 떼어 낸 자리 대충의 손질 틈새를 비집고 억수 빗물이 새어 들었으므로 산골 백수의 하룻밤이 질척하고도 어수선했다. #. 앞 동네 아우의 산속 샘물 집수조를 아름드리나무가 넘어지며 깨뜨리는 바람에 며칠 째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 기어이 자발적 일꾼이 되어 여러 ..

소토골 일기 2022.10.09 (27)

세미 겨울,

#. 구월의 서른 날이 지던 날, #. 달력에선 시월이 기다리고 문 밖에선 겨울이 대기 중인 산골짜기, #. 세미 겨울 쯤? #. 신 새벽 창문을 여니 잔뜩 옹크린 시월이 시린 발걸음으로 성큼 들어섰다. #. 갈색 그리움 먼저 가슴에 뛰어들고도 이쯤에도 자꾸만 시려 드는 마음, 가슴 저림은 또 어떻고, #. 별 것 아닌 일에도 찔끔 울고 싶어지는 참 인간적인 시월, #. 또로록~ 문자 하나, 겨울보다 먼저 독감 침공이 예상되니 모두들 예방 주사를 맞으시라는 전갈이나, #. 독감보다 더 급한 그리움 예방 접종, #. 기어이 서실 동무들이 쳐들어 오겠단다. 다시 뭉쳐야 한다는 거다. #. 그러나 이미 서(書)까지의 선에서 마음 정한 일, 예(藝)까지의 길은 그대들만 가시게나 #. 전 국민이 집 밖에선 마스크..

소토골 일기 2022.10.01 (29)

어수선 대수선,

#. 찬 이슬 내리고 아침은 시리다. #. 이렇게 숲 속의 나무들이 수척해지고 들판이 비워지고 나면 겨울이 불쑥 점령군 처럼 들이닥치는 산골, #. 서 산 눈시울이 붉다. #. 하수구와 싱크대의 연관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고단한 목공 일에 멱살 잡혀 여러 날 째 톱질 중, #. 아무리 잘 박아도 못 박기, 잘 뽑아도 못 뽑기, #. 날마다 설거지는 사은품, #. 백수의 팔자가 참 버롸이어뤼 하도다. #. 퇴직 후 몇 해 깍두기 일을 하던 후배의 전화, -이제 완전 백수를 시작하겠습니다. -넌 이제부터 주겄따. #. 이 친구가 도대체 어떻게 이 산 중에 올랐는지 아내의 화분 속에 어느 날 꽃 한 송이 피었는데 제법 예쁜 얼굴에도 새촘이 가득하고도 한사코 통성명을 거절, 손전화를 코 끝에 들이대면 이름..

소토골 일기 2022.09.21 (30)

평캠 팔자,

#. 김장 배추밭을 김장 무 밭으로 바꾸었다. #. 유해 조수 피해 신고를 하면 총을 들고 와서 해결해 준다고 너도나도 한 마디씩 했지만 뭘 그렇게 까지, #. 유해? 다분히 사람 중심적 표현이다. #. 한마디씩 한 사람들 마다 가을에 배추 열포기씩 내놓으라고 쐐기박기, #. 건조기의 기름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넋 놓고 가동한 결과 다시 기름을 넣고도 경고음만 요란할 뿐, #. 한나절을 주물러 터친 끝에 해결은 되었으나 딴 일로 잠깐 자리 비운 새 여과기를 통해 새어 나온 기름량이 제법이라서 #. 올해는 엄청 비싼 고춧가루를 먹게 생겼다. #. 그리하고도 추석을 지낸 날부터 하수구가 막혀 요지부동, #. 집 지은 지 스무 해가 넘었으니 사람의 동맥경화처럼 하수구 경화증이다. #. 임시방편의 기구와 방법이..

소토골 일기 2022.09.16 (24)

낮은 자리 아주 작게,

#. 아내가 도회 모임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홀로 산골에 남기로 한다. #. 쉬고 잘 곳이 정해져 있음에도 어두울 무렵부터 시작되는 객창감 이거나 미아의 고립감, #. 정 깊은 이들의 눈빛과 손길을 잡고 있음에도 도대체 삼투되지 않는 가로등 밝은 도시의 밤, #. 처방 불가의 산골병이다. #. 명절이 끝난 날 모두들 우르르 모였다. #. 소란한 틈새를 빠져나와 뜨락을 어지렁거리다 보니 밟고도 지나쳐 버릴 만큼 낮게 엎드린 꽃들, #. 아주 낮은 자리에 아주 작은 모습으로 핀 꽃들은 향기조차 너무 작아서 세속의 코로는 맡을 수가 없었다. #.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것들과 너무 큰 것들,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소리들과 너무 큰 소리들이 분명히 있을터이니 사람의 감각으로 정한 크기란 아무 ..

소토골 일기 2022.09.12 (26)

추석 고요,

#. 벌초를 끝내고 미리 명절 차례 올렸다. 말하자면 One stop 으로··· #.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조상님 혼령께서도 귀신 같이 아실 일, #. 딸만 둘인 며느리는 명절 때마다 친정어머니께서 홀로 계셔야 하는 것, #. 명절이 두 번이니 추석엔 친정으로 가도록 하였다. 두 번 다 가도 괜찮고··· #. 배추 모종을 두 번씩 이나 심었지만 고라니만 두 번씩 이나 횡재를 했으므로 그 빈자리에 다시 무 씨앗을 넣었다. #.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를 만나는 황홀한 산골, #. 모든 것이 기적이다. #. 여름 지나도록 추녀 끝에서 수박덩이만큼 여물어 가던 말벌집을 야음을 이용하여 떼어냈다. #. 갑작스러운 횡액으로 벌집 가득 우왕좌왕하던 생명들, #.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여전히 지난하다. #. 바람과 ..

소토골 일기 2022.09.09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