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916

착종 계절,

#. 연휴 뒤에 또 연휴, #. 그리하여 손님 뒤에 또 손님, #. 개울 옆을 걷는 새벽 운동 길을 햇볕 넉넉한 한 낮 가을의 사타구니로 향한 산길로 바꿨다. 나무와 바위들이 울긋불긋 말을 걸어왔다. #. 병원 대기실에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두를 대기시켜 놓은 뒤에야 정우의 이빨 치료가 끝났다. #. 거울 앞에 서 서 이빨이 모두 몇 개인지 세어 보았다. 휴우~ #. 선풍기와 난로, 반팔 티셔츠와 겨울 파커가 뒤죽박죽으로 걸려 있는 바람벽, 투명한 햇살이 치렁한 한낮과 서리서리 겨울이 담겨있는 저녁의 바람결, #. 여름과 겨울이 뒤섞인 착종의 계절, #. 앞산 정수리가 고양이 걸음으로 붉은 치장을 시작했다.

소토골 일기 2023.10.10

동동 시월,

#. 문득 가슴부터 시린 시월, #. 봄은 한 걸음 늦게 오고 겨울은 열 걸음 빨리 오는 산골, 바람 모서리가 부쩍 날카롭다. #. 마지막 고추를 거두고 들깻잎을 따고 고구마를 캐고 #. 이렇게 동동거리다 보면 어느 날 불쑥 점령군 같은 겨울이 닥치곤 했었다. #. 헝클어진 바람이 추녀 끝 풍경을 함부로 걷어차고 지나가는 산골 #. 아침 안개속에 가만히 옹크려 있는 겨울을 본다.

소토골 일기 2023.10.07

열무 김치,

#. 김장 무와 배추를 솎아 붉은 청양고추 벅 벅 갈아 넣고 김치를 담갔다. #. 청양고추를 붉게 익혔던 지난여름의 더위가 독한 매움으로 입 안에 번졌다. #. 이남박 가득 비벼 든 채 삼일 굶은 풀먹이 생명처럼 배 두드려 가며 먹고는 하늘 우러러 맴 맴 맴, #. 버섯을 딴다고 산으로 드는 마을 할머니 등 뒤로 뚝 뚝 나뭇잎이 지거나 세월이 지거나, #. 문득 외롭고 자꾸 서러워지는 시월,

소토골 일기 2023.10.04

순환

#. 명절 전에 위와 장을 모두 들여다봐야 했다 그리하여 단골병원 의사는 나보다 더 내 속을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 꽃 진 자리마다 옹골진 열매가 되어 가을바람에 허공 그네 뛰기, #. 아내는 아이들 명절빔을 손수 만들겠다고 며칠의 밤이 깊도록 재봉틀 신공 중, #. 살림의 정수인 밥 짓기 설거지 하기에 집 안 청소하기를 며칠 째 임에도 보조역으로 주변 맴돌기, #. 나도 얼른 재봉틀을 배워야겠다. 장차 생존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 오지도 말고 가지도 말자고 그래서 오롯이 나를 위한 명절을 만들자고 일찌감치 못 박아 두었지만 #. 명절 뒤의 휴일이 넉넉도 해서 하늘을 뛰어오르고 싶은 아이들이 우르르 산속으로 몰려들었으므로 천방이 갈라지고 지축이 흔들리는 날들, #. 이웃 도시의 유적지를 둘..

소토골 일기 2023.10.02

산골 밥상,

#. 마당가 샘물에 발을 씻은 뒤 다리의 물기를 턴다는 것이 샘가의 돌을 걷어찼다. #. 가을 하늘빛이 노랗다. #. 씨 뿌린 무 싹들이 제법 자랐기에 한 줌 솎아 한 그릇 비빔밥을 만들어 볼 미어지게 먹는 산꼴짝 늙은 부부, #. 뜨락의 씀바귀 잎과 허공에 매달린 밤톨 몇 개 얻고 볼품없는 토마토 몇 개 못난이 오이 한 개 마당가 달래까지 아! 그리고 지난 여름부터 냉장고에 두었던 옥수수 알갱이 몇 개를 떼어 넣고 비빔 비빔 샐러드 #. 여름과 가을을 버무려 차린 산골짜기 풀(草)코스 밥 상,

소토골 일기 2023.09.23

자유 가을,

#. 한 동안 아프다. 자주 아프고 길게 아프다. #. 이가 아프고 배가 아프고 어깨가 아프고 눈이 아프고 종합쩍으로 아프고 복합쩍으로 우울하다. #. 엄마의 줄을 끊어 나를 사람의 세상으로 보내면서 문신같은 꽃 한 송이 몸 가운데 놓아주셨다. #. 그래서인지 몸이 아픈 밤 이면 살곰살곰 배꼽이 아팠다. #. 몸의 통증이 잠시 쉬는 사이 글씨를 쓰고 벌초를 했다. #. 아이들은 서해 바다에서 놀고 또는 수목원의 맨발 걷기를 하며 무럭무럭 자라는 새 #. 나는 무럭무럭 늙었으므로 가을은 제법 소슬한데도 #. 나날이 고추 뒤집어 주기, 얼른 저 홀로 뒹굴 뒹굴 굴러 다니며 마르는 신품종 고추가 나와야 한다 #. 서실을 버리고 홀로 쓰는 글씨, #. 무슨 일이든 매이지 않은 채 소소하여 자유하고 싶다.

소토골 일기 2023.09.11

여름 결산,

#. 장마 뒤의 뒤풀이 장마로 2박 3일 비 오신 후 반짝 해님, #, 고추 백오십근쯤 따서 건조기로 반 햇볕으로 반 말려가는 중, #. 고추가 말라가는 만큼 이 몸도 바삭하게 말라가고 있다. #. 감자를 열다섯 박스쯤 거두고 고추를 따서 말리고 옥수수 거둔 자리에 심은 들깨가 푸르게 자라고 김장 배추 150 모종을 심고 벌에 일곱방 쏘여서 된장 열 사발쯤 바르고 깔따구에 다섯방쯤 물려서 피부과 한 사흘 다니고 감기 앓기에 뒤 늦은 코로나 치레며 안과와 치과 덤으로 한의원 이러다가 산부인과까지 가야 할 지도... #. 올 여름 흘린 땀들이 흐르고 모여 바닷물은 저토록 푸르게 넘실거릴 수 있겠고녀 #. 햇살이 힘을 잃는 칠석이 지나고 풀들이 자라기를 멈춘다는 처서가 지났으므로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다... 를..

소토골 일기 2023.08.25

8월 넋두리,

#. 오로지 걷기를 위한 신발 하나를 샀다. #. 셀프 생일 선물, #. 불쑥 먼 도시에 사는 친구 부부가 들어섰다. 일요일인 오늘 잠시 아이들로부터 벗어났음을 알겠다. #. 장이 고장 나는 바람에 병원 고생을 잠깐 했노라는 하소연과 손주들 돌보는 일로 힘들고 행복한 얘기들이 수다되어 질펀했으므로 #. 뒤늦은 위로 겸, 고개 너머 작은 음식점에 앉아 소만큼 먹었다. #. 병원 일도 아이들 일도 동병상련이 된 셈, #. 다만, 사랑에 빠진 잠시의 게으름이 죄목 되어 은하수 동쪽과 서쪽을 그리움으로 채워야 하는 견우와 직녀가 까마귀와 까치의 머리통을 즈려밟아 만나는 날, #. 견우화라는 이명을 가진 나팔꽃이 울타리에 조롱조롱 매달린 산골 아침, #. 새벽 잠자리에선 이불깃을 당겨 덮어야 했다. #. 그런데도..

소토골 일기 2023.08.21

여름 건너記,

#. 예겸이 가족이 엄마의 휴가에 맞춰 일주일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 아이들의 소동과 일상의 소요를 늘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그저 끌어 안기, #. 데크 위 그늘 막 설치를 위해 끈 묶을 나뭇가지를 헤치던 중 우르르 덤벼 든 벌떼, 대번 손 등이 얼큰하다. #. 이 또한 내 겪음이니 다행, #. 소나기 내리기 전 바람은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했으므로 가만히 나뭇 그늘에 앉아 바람 섞인 비에 몸 적시기, #. 그리하여 어떻게든 여름 건너기, #. 결혼 후 처음 손수 운전으로 내려온 며느리의 주변을 한 바퀴 둘러 막국수를 먹겠다는 야심 찬 계획에 멱살 잡혀 생 내비게이션이 되어야 했다. #. 잠시 눈을 감으면 88 청룡 열차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 하필이면 구비 많은 영월길을 돌고 돌아 휴가로 집..

소토골 일기 2023.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