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915

허둥지둥 봄 준비,

#. 산꼬댕이 햇살이 홀아비 양지에 쪼그려 앉아 이 잡기 딱 좋을 만큼 나긋나긋 늘어진 한 낮, #. 봄 보다 먼저 거름 포대가 올라왔다. #. 하여 또 자발적 농사가 아닌 등 떠밀린 농사가 될 것, #. 팔삭둥이 2월 이거니 입춘이 있고 우수가 들어 있는데 하늘은 다시 60% 확률의 눈을 예고하고 있었다. #. 대략 마스크를 해제한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기념하여 정우 손 잡고 목욕탕엘 가서는 그 고사리 손에 등을 맡기는 황홀함, #. 평생에 딱 한번 뿐 이라도 그저 황송하고 황홀한 일, 이 무슨 복인지··· #. 마을 안에 또래들 모임을 만든 지 십여 년 처음으로 두 부부가 신입하였다. #. 늙어가는 나이에 선택한 시골살이 질박한 정서에 마음 다치는 일 없었으면, #. 겨우내 덮어 두었던 서예를 다시 시..

소토골 일기 2023.02.10

꽃 자리,

#. 말을 타고 달리던 인디언은 잠시 뒤 돌아보며 쉬는 시간을 만든다고 한다. 헐떡이며 쫓아 오는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기 위해, #. 하루종일 내 뒤를 헐떡이며 쫓아다녔을 영혼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를 마련한다. #. 말도 차도 없이 영혼과 손잡고 도란도란 걷는 일, #. 자기 문명을 가꾸는 일이다. #. 발목이 묻힐 만큼의 눈이 내렸다. 봄 꽃 앉을 자리마다 소담한 눈 꽃들, #. 여전히 꼬 끝 매운 바람인데 마을 반장의 알림이 있었다. #. 고추 영농 교육이 있으니 참가하라고, #. 사람의 손으로 고추를 조장하기보다는 고추의 필요에 맞추어 사람이 부지런하면 됐다... 싶구먼, #. 한 주 뒤의 입춘을 위해 입춘첩을 준비하자고 했지만 꼼지락 조차 귀찮은 날들, #. 그저 입춘날 절입 시간 각자의 문간에..

소토골 일기 2023.01.30

겨울 건너기,

#. 동지 지난지 닷새째 낮의 길이가 쌀알 다섯 톨만큼 길어졌겠다. #. 예보에 관계없이 어떻게든 눈을 뿌리는 하늘, 사방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온통 흰색으로 아득하다. #. 나뭇가지엔 산새들 모습 간데없고 헝클어진 삭풍만 치렁한 산 속, #. 새로이 맞을 새해 첫 달에는 최소한 바람 불어서 최대한 추운 소한 대한이 옹크려 있다 #.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아이가 내민 카드에는 이야기해 줘서 고맙고 밥 줘서 고맙고 장난감 고쳐줘서 고맙고 마트 가 줘서 고맙고... #. 때론 억지 강짜를 부리던 그 작은 속에 이렇게 예쁜 기억의 그릇이 있어서 올올이 펼쳐지기도 하는 것, #. 나는 다만, 네가 있어서 고맙고, #. 아침마다 최강한파가 올 예정이니 알아서 잘 살아내라는 국가적 격려와 응원에 힘입어 잔뜩 끼어 입..

소토골 일기 2022.12.27

취미와 취로,

#. 어떤 이가 신 누구누구를 좋아하면 공산주의자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니의 책이 서가에 세 권쯤 있음에도 다시 새로운 책을 구해 펼쳐 들었으니 이 정도면 새빨간 공산주의자가 될 일이다. #. 마을 저녁 모임에선 날 선 목소리로 신누구누구를 성토하며 거나해지도록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 신누구누구가 쓴 "처음처럼" 여러 병이 빈 몸이 되어 깔깔깔 함부로 나뒹굴던 저녁, #. 산골짜기 늙어가는 부부의 일과란 것이 아내는 집안에 들인 화초를 돌보거나 돌돌돌 재봉틀 돌려 옷을 짓거나 가끔 고양이를 어루만져 밥을 주거나의 우아틱한 취미 생활이고, #. 집 밖으로 동선이 큰 강아지 돌보기와 이런저런 허드렛일들, 말하자면 찬바람 맞아가며 해야 하는 일들은 몽땅 내 일이니 내게는 취로 생활쯤 되겠다. #. 이장부..

소토골 일기 2022.12.09

김장 후,

#. 김장은 이제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이다. #. 따라서 김치도 필수가 아닌 선택의 식품이다. #. 고춧가루와 양념들로 화장을 마친 배추들은 땅속에 묻힌 항아리가 아닌 김치냉장고에 모두 수감되었다. #. 그리고 동치미 대파 김치 섞박지... 등 등, #. 김장을 하는 이도 김장을 돕는 나도 서로의 고단한 몸이 소금에 절은 배추보다 더 무겁다. #. 내년엔 우리도 김치 사 먹기로... 마음먹었다. #. 이박삼일 동안 정비 공장에 누워 있던 차를 찾으러 가는 시간, 시골 버스 안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만 가득 흔들리고 11월의 몇 날들이 서툴게 춥고, #. 초로의 여인네 둘이서 햇살보다 더 끈적한 수다를 늘어놓는 끄트머리 "뭘 먹어야 아픈데 읎이 오래 산대유?..." #. 뱀에게 불로초를 빼앗긴 길가메시의..

소토골 일기 2022.11.10

함께 가는 길,

#. 바람처럼 시월이 비워졌다. #. 달력은 헐렁하고 세월은 묵직하고 #. 나뭇잎들이 허공에서 쏟아져 내려 보도의 삭막을 점묘하고 있었다. #. 그걸 한사코 사진에 담겠다고 발걸음 멈춘 채 이리 째려보고 저리 찍어 보고 #. 새로 정한 걷기의 산길은 가을의 사타구니로 향해 있었다 #. 아이의 돌날, 하루 전 시간을 여벌로 얹어 손 윗 동서 댁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아침상 준비 과정이 이채롭다. #. 처형이 달걀을 꺼내면 동서는 프라이팬을 대령하고 고기를 꺼내면 칼과 도마를 대령하고 #. 입 속의 혀 처럼 혀 끝의 꿀 처럼, #. "···떨어진 은행나무 잎은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이라고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내뱉은 요절한 시인의 구시렁 때문인지 가로 청소원이 아주 힘센 송풍기로 나무 아래의 낙엽..

소토골 일기 2022.10.30

이모티콘에 대하여,

#. 참 독하기도 하지, 며칠의 서리로 주변의 푸르렀던 잎들 모두 주저앉았건만 이 맘 때 쯤에야 향기 가득한 꽃으로 피는 들국화, #. 이제 제법 겨울 준비가 된 듯하여 그만 좀 누워야겠다... 마음먹을 때쯤 김장할 때 써야 할 바깥 수도가 덜커덕 고장이 나서 허리가 얼큰하도록 삽질하는 동안 머리, 어깨 위로 깃털처럼 가볍게 뛰어내리던 나뭇잎들, #. 가을은 깊고 통증도 깊고녀~ #. 외할머니 품에서 키워진 예온이는 갖은 아양과 굴종에도 불구하고 그저 멀뚱 새침하다. #. 아이 돌잔치를 정리하는 시간, 아이의 외할머니께 정중히 인사했다, "아이들 키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 처가 밀착도가 더 큰 아이들이 외가 친밀도가 훨씬 더 큰 아이들로 키우는 일, 장차 이 세상은 모계 중심으..

소토골 일기 2022.10.24

훈수의 결과,

#. 왜 엄마 아빠는 내 생일날 결혼했어? #. 정환이의 생일과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 겹친 날, 정환이의 도치된 의문, #. 케잌에 선물에 깍두기로 정우까지, #. 털리고도 기꺼운 행복, 뽀뽀 수천만 번, #. 지난봄 스테파노의 훈수가 있었다. 옥수수 심는 사이사이 고구마 싹을 꽂아 놓으면 옥수수 베고 난 뒤에 뒷 산 덩치만 한 고구마들이 줄줄이 달릴 거라는··· #. 쇠스랑과 호미질 수천만 번, 나온 고구마 달랑 아홉 개 쯤, 크기는 빈대 콧구멍 만한 것들이 출토 되었다. #. 사은품으로 고구마 줄기만 수레 가득, #. 스테파노와 친구 끊기를 해야겠다. #. 낡아가는 집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문제들 중에 가장 큰 골칫거리 하나, #. 지난해부터 마당에 설치된 바깥 등 어디에선가 누전이 진행되어 늦은..

소토골 일기 2022.10.14

새벽 수다,

#. 하늘엔 구름이 흐르고 덩달아 세월도 흐르고, #. 하늘은 참 맑았고 허공은 또 셀로판지처럼 투명하다. #. 주머니마다 도토리 이거나 밤 몇 톨이 들어 있어도 좋은 시월, #. 하수관 청소 이후 도미노처럼 이 일 저 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 싱크대를 교체하고 윗부분의 전등갓을 바꾼 뒤 다시 조리대 위에 전등 늘여 달기, #. 지난해 집안 난로를 바꾼 뒤 연통을 새로 설치하는 바람에 지붕을 수직 관통한 연통을 철거하는 일, #. 연통 떼어 낸 자리 대충의 손질 틈새를 비집고 억수 빗물이 새어 들었으므로 산골 백수의 하룻밤이 질척하고도 어수선했다. #. 앞 동네 아우의 산속 샘물 집수조를 아름드리나무가 넘어지며 깨뜨리는 바람에 며칠 째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 기어이 자발적 일꾼이 되어 여러 ..

소토골 일기 2022.10.09

세미 겨울,

#. 구월의 서른 날이 지던 날, #. 달력에선 시월이 기다리고 문 밖에선 겨울이 대기 중인 산골짜기, #. 세미 겨울 쯤? #. 신 새벽 창문을 여니 잔뜩 옹크린 시월이 시린 발걸음으로 성큼 들어섰다. #. 갈색 그리움 먼저 가슴에 뛰어들고도 이쯤에도 자꾸만 시려 드는 마음, 가슴 저림은 또 어떻고, #. 별 것 아닌 일에도 찔끔 울고 싶어지는 참 인간적인 시월, #. 또로록~ 문자 하나, 겨울보다 먼저 독감 침공이 예상되니 모두들 예방 주사를 맞으시라는 전갈이나, #. 독감보다 더 급한 그리움 예방 접종, #. 기어이 서실 동무들이 쳐들어 오겠단다. 다시 뭉쳐야 한다는 거다. #. 그러나 이미 서(書)까지의 선에서 마음 정한 일, 예(藝)까지의 길은 그대들만 가시게나 #. 전 국민이 집 밖에선 마스크..

소토골 일기 2022.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