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좌충우돌 농사 일기,

햇꿈둥지 2024. 8. 23. 03:05

 

#.
고추를 따서
씻어서
건조기 채반에 고이 눕혀 모시기를 사흘,
이제 그만 건조기를 가동하리라고
전기 스위치, 건조기 스위치를 아무리 눌러봐도
묵묵부답, 

#.
자세를 최대한 공손히 하여
다시 또 다시 작동해 봐도
여전히
요지부동,

#.
에이에쑤를 해 준다는 곳에 전화를 했더니만
된통 바뻐서 4일 뒤에도 될똥 말똥 하다는
갑의 갑쯤으로 느껴지는 거드름이
전화기 너머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
이런 분위기들이
가끔은 시골살이 청맹과니를 두드려 깨우는 회초리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인터넷 과외를 해가며
건조기 쭈무르기를 한나절,

#. 
나는 땀에 절었거니
건조기는 뽀송하게 살아나서 
다시 펄떡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
이 땅에 하늘이 열려
고추 건조기가 보급된 이래
최고의 장한 일이로다.
그런 뒤로

#.
배추모종 150쯤을 사서 비짓땀을 쏟아가며 심었는데,
분명히 심었는데
이틀 뒤에 밭에 들어서 보니
푸르뎅뎅 있어야 할 배추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난해처럼 고라니 짓인가 하여 살펴봐도
도대체 어느 한 곳 흔적이 없어서
다시 모종을 사며 물었더니
더운 날씨 탓 이라더라

#.
겨울 배추를 심었었나?

#.
산꼬댕이 임에도
밤늦게 까지 에어컨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니
누굴 만나기도 싫고
무얼 먹기도 싫고
책 읽기도 싫고
글쓰기도 싫고
아프기도 싫고,

#.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지났으니
분명히 법쩍으로 가을이 맞는데
한 밤 풀벌레 소리들이
신음처럼 들리는,
이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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