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915

겨울 무늬,

#. 아득한 하늘에서 분분한 눈송이들 올려다보고 있으면 눈송이 보다 먼저 현기증이 쏟아져 내렸다. #. 추위의 현신, 허공 조차도 간혹 제 모습을 흘려 놓을 때가 있어 저토록 예쁜 문양을 만난다. #. 동지가 지나면 하루에 쌀알 한 톨만큼씩 낮이 길어진다고 했다. 느리지만 봄으로 그리고 여름으로 가는 시간들, #. 갑진년이라 하니 뭔 일을 하든 값진 일이 될 것 같은, #. 허튼 소리에 할머니 한 분 틀니가 빠질 만큼 웃더니 매일매일 한 번씩 들려 요 딴 얘기를 한 가지씩 해야 한다는 거다. #. 스무 장 너머의 입춘첩을 쓰기로 한다 마을 안 많은 이들의 이구동성, 이 또한 오지랖이다. #. 맘 놓고 눈 내리던 날 제 키 만큼의 높이로 우뚝하던 꼬마눈사람들이 더러는 눕거나 엎드려서 겨울의 잔재로 녹아내리..

소토골 일기 2024.01.05

낭만과 낙망 사이,

정환이의 크리스마스 카드 #. 기온이 곤두박질하여 사위에 백설이 만건곤하니 고치 속 애벌레처럼 집안에 들어앉아 겨울 속을 표류하는 중, #. 새벽 눈 위에 종 종 종 · · · 새와 짐승들이 남긴 춥고 정직한 행선지, #. 방학을 하면 눈썰매 눈 사람 눈싸움...을 하겠노라는 부리 노란 아이들의 합창, 집 오름 길의 눈은 누가 치우나? #. 눈 쓸어 길을 열고 눈썰매 준비하고 눈싸움으로 기꺼이 맞아주고 눈 뭉치 하나 번쩍 들어 올려 눈사람 머리를 만드는 일과 오만 잡동사니 허드레 일들을 떠맡을 것이 뻔하니 #. 내리는 눈은 잠시 낭만, 내린 뒤의 온갖 일들은 낙망 뿐인 이런 겨울, #. 겨울의 바닥인 동지도 지나 어느새 성탄 전야, 다녀 가신 모든 님들께 평화를 드립니다~

소토골 일기 2023.12.24

대동 꽐라,

#. 마을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 해를 결산하고 마감했습니다 #. 사람도 늙고 마을도 늙어 사소한 일 마저 아귀가 쫀쫀하게 맞지 않으니 이런저런 시비가 일고 더러는 목소리가 커지기도 합니다. #. 그러나 기어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일, 점심 상이 마련 되기 전에 모두들 다독다독 정겹습니다. #. 그리하여 권커니와 잣 커니가 늘어지고 #. 시비로 키웠던 목소리를 모아 건배 소리 우렁 차더니 해넘이 무렵 기어이 마을 많은 이들이 대동 꽐라가 되었습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눈 위에 갈짓자 발자욱이 어지러우니 #. 산속 지붕 낮은 집들에 모여 사는 모두들 한 해 잘 건넌겁니다 딸꾹~

소토골 일기 2023.12.21

겨울 산골,

#. 하루종일 말 한마디 나눌 이 없는 진공의 적막, 고요의 고요, #. 어스름 뒤 따라 어둠보다 먼저 외로움이 발을 들여 놓았다. #. 작은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유일한 동사가 되어 허공 속에 비틀거리는 산골, #. 여름날 그토록 수다스럽던 산새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한 안부, #. 새벽까지 치렁한 빛을 뿌리던 열나흘 달님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서산을 넘는 시간, #. 온 들에 표창 같은 서리 내리고도 #. 청남빛 허공 가득 투명하게 전도되는 추위, #. 그리고 · · · · · 눈이 내렸다.

소토골 일기 2023.11.27

게으름 고추가루,

#. 햇볕에 말린 태양초는 양건이라 하고 건조기로 말린 고추는 화건, 건조기와 햇볕을 반반쯤 섞어 말린 고추는 반양건이라 한다더라. #. 시골살이 처음으로 냉(冷)건을 시도 중이다. #. 의도된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게으름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 11월 이른 추위에 살짝 얼다가 녹다가 제 풀에 지쳐 반 넘어 마른 고추를 이제야 거두어 말린 뒤 가루 지었다. #. 냉건하여 만들어 낸 게으름(懈) 고추(椒), 해초(懈椒)라고 해야하나? #. 맛이야 어찌됐건 얼었다 녹아 고춧가루가 되었으니 어느 음식에 들어가든 시원한 맛은 분명 할 듯,

소토골 일기 2023.11.22

어쨌든 김장,

#. 여름 내 애써 키우고 말린 고추를 가루 짓고 지난 우박에 구멍이 나기도 한 무 배추를 거두어 김장을 한다. #. 곱게 포장된 포기김치가 집 앞 편의점 매대에 사철 누워있고 재료가 아닌 완결된 음식이 전화 한 번으로 집까지 배달되는 시대의 김장이란 #. 다분히 관성적 행위 일수도 있겠다. #. 그러나 김치 속에서 띄엄하게 만나지는 노을빛 연서 같은 나뭇잎 이거나 김치가 만들어지는 동안 먼 길을 온 사람들의 왁자한 수다와 집 안팎을 소요롭게 뛰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들이 #. 서로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한겨울 곰삭은 맛을 우려내는 가슴 따듯한 사람의 음식이 될 터이니 #. 나눈 뒤에 조차 아쉬움 가득한 정 까지 더불어 익을 것이다. #. 어쨌든 김장했다. 그리하여 겨울이 되든 말든 흰눈이 오든 말든, #...

소토골 일기 2023.11.16

어느새 겨울,

#. 푸르렀던 생명들이 속으로 여물어 자못 숙연한 계절, #. 누옥의 창문을 모두 닫는다. #. 겨울준비 삼아 집 주변을 정리한다. 그래봤자 이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것들을 저 구석에 다시 감춰두는 일, #. 작은 바람에도 함부로 떨어지는 나뭇잎들, #. 세월조차 함부로 쏟아져 어느새 십일월의 첫날, #. 흐리고 비가 내리고 그 빗 속에 겨울이 내렸다. #. 모서리 날카로운 바람이 자주 문틈을 기웃거리고 이르게 서리도 눈도, 덤으로 우박도 내렸으므로 가을은 가만히 등 돌려 서러운데 추녀끝 바람 가득 어느새 겨울,

소토골 일기 2023.11.01

좌충우돌 시골살이

#. 먼 도시 병원의 cancer center, 이런저런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던 의사는 6개월 검진 기간을 1년으로 늘였다. #. "깨끗하고 좋다"는 짧은 소견, #. 그가 정 해준 1년의 시간이 어쩔 수 없이 내 미래의 전부가 되는 아프고 우스운 오늘, #. 해도 해도 하는 사람의 노고일 뿐, 일 한 자리 표도 나지 않는 억지 이거나 안 해도 될 일...들의 끝에 어깨와 목의 통증이 갈수록 심해졌으므로 묵히고 키운 후에 정형외과를 찾아 처방보다 먼저 핀잔을 들어야 했다. #. 손바닥이 온통 거칠어질 만큼 고된 일들을 잠시 접어 두고 작업복 대신 정장으로 포장을 바꾼 뒤 음악회를 간다. #. 도시의 밤 한켠이 베토벤의 선율에 젖어 있던 시간, 소토골 하늘에는 하마스의 로켓포 같은 우박이 퍼 부어졌으므로 ..

소토골 일기 2023.10.27

겨울로 가는 길,

#. 추운 거미는 단풍잎과 이슬로 연명 중, #. 박제된 여름, #. 예보된 1℃에 산골짜기 하늘은 마음 놓고 무서리를 쏟아부었다. #. 뜨거웠던 여름의 기억조차 세월의 나이테에 묻혔으므로 누옥의 창문을 모두 닫는다. #. 길게 누운 산그림자 끝에 앉아 고구마 대신 줄기를 거두는 동안 #. 우르르 산비탈을 내려온 바람이 내게 겨울로 가는 길을 물었다.

소토골 일기 2023.10.18

착종 계절,

#. 연휴 뒤에 또 연휴, #. 그리하여 손님 뒤에 또 손님, #. 개울 옆을 걷는 새벽 운동 길을 햇볕 넉넉한 한 낮 가을의 사타구니로 향한 산길로 바꿨다. 나무와 바위들이 울긋불긋 말을 걸어왔다. #. 병원 대기실에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두를 대기시켜 놓은 뒤에야 정우의 이빨 치료가 끝났다. #. 거울 앞에 서 서 이빨이 모두 몇 개인지 세어 보았다. 휴우~ #. 선풍기와 난로, 반팔 티셔츠와 겨울 파커가 뒤죽박죽으로 걸려 있는 바람벽, 투명한 햇살이 치렁한 한낮과 서리서리 겨울이 담겨있는 저녁의 바람결, #. 여름과 겨울이 뒤섞인 착종의 계절, #. 앞산 정수리가 고양이 걸음으로 붉은 치장을 시작했다.

소토골 일기 202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