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953

꽃, 봄,

#. 산골짜기에도 드디어 꽃이 피었다. #. 그토록 기다리던 봄이 피었다. #. 자꾸 황송하다. #. 부리 노란 아이들의 지시어가 있었다 "내 밭을 만들어 주세요" #. 무상 경운 무상 관리 원격 파종 무상 사랑의 번외 농사, #. 참 개떡 같은 농장, #. 일찌감치 밭은 갈아 놓았으나 새로 신청한 관리기가 산골 꽃 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감자 심기가 늦었다. #. 늦게 캐면 되겠거니· · · #. 재 넘어 작은 도시로 들어서는 개천변에 벚꽃들이 팝콘처럼 터지기 시작했으나 #. 어깨 팔뚝지 발등마다 목장 풀밭에 쇠똥 널리듯 매달린 이런 일 저런 일 · · · 들 · · · #. 얼른 끝내고 떨어져 누운 꽃 잎 베고 누워 늙어 빠진 봄처녀와 히히덕 수다하여야겠다.

소토골 일기 2024.04.05

겨울 몽니,

#. 산골 음지엔 여전히 겨울의 송곳니 같은 잔설이 남아 있고도 비 오시는 틈새 간간이 섞여 내리는 눈, #. 겨울의 몽니 이거나 봄의 게으름 이거나 #. 그런 중에도 제 안에 한가득 봄을 끌어 안은채 팽팽하게 인내하는 꽃 몽우리 하나, #. 징검 징검 내리는 비 틈새 동안거에 들었던 경운기를 깨워 이제 그만 밭을 갈 참인데 앞동네 아우가 트랙터를 몰고 올라와서는 잠깐의 맴돌기 끝에 모난 돌이 지천인 산골짜기 따비밭을 곱게도 갈아 놓았다. #. 집 들어서기 바쁘게 '술부터 한잔' 달라던 그의 술빨은 술을 끊든가 목숨을 끊든가...의 극단 처방에 결국 차 한잔을 술 처럼 마시되 술 처럼 취하지는 않는 상황을 감지덕지 끌어안고 살게 되었다. #. 처음엔 꼬소하던 마음이 점차 딱한 마음이 되어 다 낫거든 기념..

소토골 일기 2024.03.30

춘분설,

#. 홀로의 점심, 아침 후 남아 있던 팽이버섯 소고기 볶음에 선사시대 부터 냉장고에 들어있던 가락국수 사리와 그렇지 봄 이로구나 윗 밭에 올라 냉이 다섯 뿌리 씻어 짬뽕하여 버무려진 맛, #. 스스로 이름하여 환장적 봄 맛 이거나 세상의 모든 맛을 지배할 전대미문의 창조적 한 끼! #. 춘분에 털썩 눈이 내렸다 겨울 가기도 힘들고 봄 오기도 힘든 산꼬댕이~ #. 새로운 환경 부적응 증세가 있는 4학년과 새로운 환경 찰떡 적응 증세가 있는 1학년이 손 잡고가는 환상의 등교, #. 앞에 가는 1학년과 뒤에 가는 4학년, 하늘 조차도 알쏭 하시도다^^ #. 묵은 밭의 마른풀들을 말끔히 걷어내고 거름을 올려서 펴고 빗질하듯 경운 하는 일, #.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농사 본능이 작동하여 배터리 새로 끼운 장난감..

소토골 일기 2024.03.22

불쑥 봄,

#. 강원도의 질기고 긴 겨울에 갇혀 있던 마을 아낙들이 네 밭 내 밭을 가릴 것 없이 냉이와 달래를 캐어 보리밥을 하겠다는 대단히 봄 스러운 결의의 불똥은 잠깐 말참견을 했던 내게로 튀어 우리집 좁은 현관을 신발로 가득 채우는 일이 되고 말아서, #. 기왕 이 꼴이 되었으니 이장도 부르고 장청회장도 부르고 지난 가을에 돌아가신 저 아랫집 아저씨도 부르고... #. 잠깐의 낮잠 끝에 허큘리스급 지대지 미사일을 다발로 맞은 꼴이 된 아내는 승깔 낼 새 읎이 보리밥 하랴 안주 장만하랴 #. 어쨌든 일 저지른 나는 그저 성실한 마당쇠가 되어 안 시키는 심부름 까지 도맡아 해 내느라 종횡과 무진의 신공, #. 아직 싹도 오르지 않은 달래를 귀신 같이 캐고 여전히 얼어 죽은듯 자줏빛으로 엎드려 있는 냉이를 후벼 ..

소토골 일기 2024.03.17

나들이 후유증

#. 50%의 매연과 48%의 소음과 2%의 한숨, #.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 길, #. 낯 선 것들이 더 많아진 거리에는 낯 선 사람들만 가득했으므로 #. 나는 먼 나라의 이방인 처럼 모든것이 서툴었다. #. 안동으로 떠나는 3시 22분발 기차를 기다리는 일군의 사람들이 잠시 서울 속에 겡상도를 만들어내는 대합실, #. 그 소란의 틈새에 비둘기가 날고 바람이 휘청거리고, #. 여전히 조금 추운 대합실 의자에 앉아 창의 크기로 잘린 서울의 하늘을 본다. #. 향토 농산물 특별 매장과 회색 비니 모자를 쓴 비구니와 힘겨워 보이는 여행 가방을 끄는 이국의 처녀들과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한량의 플래카드와 #. 모두 섞여 만들어진 도시 속에 따로의 너와 홀로의 나와 우리가 아닌 우리들이 용케도 한곳으로 흐르고 ..

소토골 일기 2024.03.12

명절 후,

#. 극성의 시너지 효과 #. 사내아이 셋 틈에 지지배 하나, #. 극성의 핵이다. #. 장차 이 노릇을 어이할꼬 #. 세배 돈은 작년 받은 돈의 세배여야 한다는 억지, #. 아내의 지청구로는 내 발등 찍은 결과란다. #. 명절 같은 거 없어야 한다. #. 아이들은 콩나물 처럼 자라고 #. 아이들 자라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나는 늙어가고 있다. #. 아이들 떠난 자리 두시간 넘어의 복구 작업, #. 에고 삭신이야~

소토골 일기 2024.02.14

생애 최초의 말년,

#. 정환이는 오늘도 땡땡이, #. 생애 최초의 유치원 말년, #. 말년 병장보다 더 느긋하시다. #. 초딩이 입학 준비를 위해 세 번의 예방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데 두 번째 주사를 맞은 뒤로는 조금 거만해졌다. #. 학교 갈 때는 정우 엉아와 함께 하교 길은 당연히 할아버지가 데리러 와야 한다는 완벽한 자기 종결, #. 정우에 이어 난 뭥미? #. 무거운 눈이 내리던 1월의 어느 날, 정우, 정환이, 예겸이에 예온이 까지 얼기설기 만들어 세웠던 눈과 얼음으로 빚어진 하이브리드 눈사람이 입춘을 맞이하여 푸석하게 말라가고 있다. #. 겨울의 잔재,

소토골 일기 2024.02.03

만두 법석,

#. 예겸이 가족의 일주일 북새통 뒤에는 사은품으로 감기가 남아 있었다. #. 덕분에 정들어 궁금했던 시내 병원의 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 병원 다니면 일주일 그냥 버티면 7일쯤 앓게 된다는 이노무 감기, 몸 안의 체액이 몽땅 콧물로 흘렀다. #. 며칠째 콧구멍이 얼큰하다. #. 그리고도 극성왕성 하신 아내의 모의로 시작된 처가 식구들의 2박 3일 만두 법석, #. 온갖 수다를 만두소 삼아 산골 한밤이 뜨끈하고 왁자하였으므로 #. 홀로 저 먼 구석에 낑겨 긴 긴 겨울밤 감기 앓기에 좋았다.

소토골 일기 2024.01.13

겨울 무늬,

#. 아득한 하늘에서 분분한 눈송이들 올려다보고 있으면 눈송이 보다 먼저 현기증이 쏟아져 내렸다. #. 추위의 현신, 허공 조차도 간혹 제 모습을 흘려 놓을 때가 있어 저토록 예쁜 문양을 만난다. #. 동지가 지나면 하루에 쌀알 한 톨만큼씩 낮이 길어진다고 했다. 느리지만 봄으로 그리고 여름으로 가는 시간들, #. 갑진년이라 하니 뭔 일을 하든 값진 일이 될 것 같은, #. 허튼 소리에 할머니 한 분 틀니가 빠질 만큼 웃더니 매일매일 한 번씩 들려 요 딴 얘기를 한 가지씩 해야 한다는 거다. #. 스무 장 너머의 입춘첩을 쓰기로 한다 마을 안 많은 이들의 이구동성, 이 또한 오지랖이다. #. 맘 놓고 눈 내리던 날 제 키 만큼의 높이로 우뚝하던 꼬마눈사람들이 더러는 눕거나 엎드려서 겨울의 잔재로 녹아내리..

소토골 일기 2024.01.05

낭만과 낙망 사이,

정환이의 크리스마스 카드 #. 기온이 곤두박질하여 사위에 백설이 만건곤하니 고치 속 애벌레처럼 집안에 들어앉아 겨울 속을 표류하는 중, #. 새벽 눈 위에 종 종 종 · · · 새와 짐승들이 남긴 춥고 정직한 행선지, #. 방학을 하면 눈썰매 눈 사람 눈싸움...을 하겠노라는 부리 노란 아이들의 합창, 집 오름 길의 눈은 누가 치우나? #. 눈 쓸어 길을 열고 눈썰매 준비하고 눈싸움으로 기꺼이 맞아주고 눈 뭉치 하나 번쩍 들어 올려 눈사람 머리를 만드는 일과 오만 잡동사니 허드레 일들을 떠맡을 것이 뻔하니 #. 내리는 눈은 잠시 낭만, 내린 뒤의 온갖 일들은 낙망 뿐인 이런 겨울, #. 겨울의 바닥인 동지도 지나 어느새 성탄 전야, 다녀 가신 모든 님들께 평화를 드립니다~

소토골 일기 2023.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