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916

고군풀투,

#. 가물기 한 달에 장마가 한 달쯤, #. 긍휼하신 하느님 조차 모 아니면 도, #. 몸 꼬아가며 가문 날들을 견디던 풀들은 밀림을 방불케 할 만큼 치솟았고 #. 볕 좋은 봄날 애중하게 심어 가꾸던 작물들은 어디 계신건지, 보물찾기 놀이처럼 예초기 둘러메고 풀과의 일전, #. 고 군 풀 투, #. 사실은 별반 차이 없는 해마다의 일이건만 힘겨운 일은 늘 새롭게 느껴지는 고질 증세, #. 게으른 선비 책장 세듯 풀 베어진 밭고랑만 뒤돌아 세는 건달 농사, #. 어쨌든 땀 절은 마당쇠 몰골에 저질의 체력은 쉽게도 고갈되어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쯤, #. 구세주 같은 소나기, 물속에 빠져 사는 것 같은 날들 중에도 다시 비가 반가워지는 은밀한 타협 뒤에 #. 집어던지듯 예초기를 내려놓고 땀 절은 몸을 산속 ..

소토골 일기 2022.07.24

길 위의 길,

#. 흐린 하늘 틈새의 인색한 햇빛을 모아 저토록 예쁜 꽃을 피웠다. #. 사는 일이 매양 기적 같아 눈물겹다. #. 수렵의 시대, 한 아이가 최고의 꾼으로 알려진 사부님을 모시고 연일 창 던지기 수업 중, 한 달 지나고 일 년 지나고 그렇게 십여 년, 사부님의 창이 과녁 정 중앙에 꽂혔고 제자가 던진 창은 과녁 한가운데 꽂힌 사부님의 창 끝에 꽂혔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도다. #. 하여 실전, 사부님의 창이 멧돼지의 옆구리에 꽂히고 제자의 창이 다시 사부님의 창 끝에 꽂히고··· #. 배우고 익히되 어리석지 않아야 하는 일, #. 장마 틈새 도끼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의 묵은 책 한 권을 구해 펼친다. #. 앞 서 읽은 이가 제법 날선 부분들을 돋아 새기고자 파랗게 칠해 놓은 선들, #. 책 속..

소토골 일기 2022.07.19

장마 탓,

#. 가뭄 끝의 긴 장마로 사방이 온통 질척 눅눅하다 #. 가만히 풀잎을 들추면 아주 작은 사마귀들이 꼬물꼬물 가을을 물어 오고 있었다. #. 장마 속 이거니 붉게 익은 자두를 바구니 가득 얻었다 #. 온통 먹물뿐이던 서실 안에 붉은 자두향이 번졌다. #. 도시의 골목에 조각보처럼 펼쳐진 고추들 #. 고추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땡볕의 햇볕을 모아 투명하게 말려야 한다는 것, 그 일을 위해 비짓 땀을 흘리고 나면 나 또한 투명하게 말라질 것, #. 재 넘어 도시 안에서 제법 친구들을 불려 가던 아이들이 기어이 그 아이들을 몰고 내 집으로 들어와 시골체험과 물놀이로 하루를 즐기겠다는 야심 찬 계획, #. 점심은 카레 간식은 김밥 그리고 또 또··· 이게 뭔 일 이래? #. 장염으로 내과, 팔꿈치 통증으로 정..

소토골 일기 2022.07.13

이런 시골살이,

#. 어항 속 붕어를 들여다보던 사람이 생각했다. 붕어들은 참 답답하겠구나, #. 어항 속의 붕어가 어항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들 유리 속에 갇혀서 참 답답하겠구나 #. 도시 속을 유영하는 친구의 한 걱정 노다지 산속에 갇혀 답답하지 않니? #. 산속에서 늴리리 맘보의 날들을 사는 나는 도시에 사는 그 친구가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 둘 다 이든지 둘 중의 누구 하나 이든지 어쨌든 갇혀 있는 거다 #. 다만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갇혀 있을 뿐, #. 아내의 재봉틀 욕심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지금 쓰고 있는 휘갑치기 재봉틀은 옛날 옛날 한 옛날 인류가 최초로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던 때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보다 쪼끔 더 나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바꾸기로..

소토골 일기 2022.06.22

여전히 소꿉장난,

#. 어쨌든 비가 왔다. #. 가뭄으로 갈라진 틈새조차 메우지 못해 흔적 없이 흘러버린 가뭄만큼 건조한 빗방울들, #.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풀들은 허공 춤을 시작했다. #. 매년의 정황이 이러했을 테니 유독 지금 상황에 빠져 허우적거릴 일도 아니겠다. #. 푸른 자두들이 태양의 속살을 담아 붉게 익어 가는 유월, #. 어지러이 초록 그늘 아래 앉아 건성으로 풀을 뽑거나 아득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일, 백수에게도 망중한이 필요하다. #. 코로나로 옹크려 살던 세월에 보복이라도 하듯 마을 젊은 축들이 관광을 가자고 했다 컵으로 돌려 마시는 소주에 취해 사람은 소금 맞은 미꾸라지처럼 들뛰고 버스는 통째로 풍기를 시작하는 광란의 일주, #. 내겐 극기 훈련이다. #. 부부가 손잡고 걷는 일, 뭘 그렇게 ..

소토골 일기 2022.06.18

온통 뻐꾹,

#. 출렁다리 울렁다리에 더해 억지 잔도를 만들었으므로 놀기에 그만이라는 풍문이 무성한 뒤 신발 있는 사람들 모두 내 차로, 버스로 미어지게 몰려들어 드디어 이 푸른 산을 밟아 죽이기로 한 건지, ∮. 사람의 집을 늘리기 위해 파헤쳐지던 산은 이제 사람의 놀잇감을 위해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 문화라는 이름을 씌워 함부로 망가뜨리는 산과 들, 그리고 강, ∮. 장차 더 많은 사람들의 더 짜릿한 놀이를 위해 산 깊은 곳곳에 연일 기계소리, ∮. 자연의 품에 안겨 본래의 길로 가는것이 생명의 길이 되는걸 언제쯤 알게될까?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을 때 까지 절대로 가지 않으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건만 먼 도시 친구들의 억지 손길을 뿌리칠 길이 없었다. #. 아침 걷기를 개천 옆 길에서 깊은..

소토골 일기 2022.06.14

옛다~ 비!

#. 목 타는 수십일 동안 비 비 비 염불을 했더니만 #. 긍휼 하시도다 하늘이여 드디어 옛다 비~ #. 땅거죽 적실만큼 성의 표시 정도의 비를 주셨도다. #. 다음 판엔 냅다 비! 를 주시어요~ #. 뭣이 됐든 빌고 매달려 볼 일이다. #. 그리하여 작물은 겨우 까치발 든 만큼 자라고 풀들만 껑충 치솟았다. #. 거 참~ 이상도하지 매일매일 신줏단지 위하듯 물 뿌려 가꾼 작물들은 지지부진하고 메마름으로 몸을 뒤틀던 풀들은 껑충 자랐을까? #. 자연 속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자란 풀들의 생명력, #. 사람의 아이를 키우는 일조차 곰 곰 다시 생각해야 할 일이다. #. 형수의 칠순이었다 케이크에 불 밝혀 환갑을 축하하던 기억이 엊그제인데 참 쉽게도 여기까지 와 있었다 #. 꽃 같은 아이들이 생겨나고 자라서 ..

소토골 일기 2022.06.07

어쨌든 빗방울,

#. 비가 온다고 했던가? 비 보다 더 요란한 예보 뒤에 그야말로 찔끔 빗방울 몇 개 오셨다. #. 산 넘어에서 초롱초롱 넘쳐흐르던 샘물이 가뭄에 덜미 잡혀 힘겹게 흐르더니 기어이 절명 하셨다. #. 잦은 비가 걱정되던 시절도 있었음을 기억하는 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 급히 상수도로 바꾸기는 했지만 문제는 비닐하우스에 심긴 고추의 급수 방식이 산속 샘물을 집수하여 점적으로 보내는 방식이니 올 고추 농사는 망했다. #. 아니면 참을성 있는 고추들이 이 가뭄을 그럭저럭 견딘 채 마른 고추를 열리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서해의 먼 섬에서 온 바지락과 산골 아욱이 만나 아득한 시절의 엄마 맛을 흉내 낸 채 황홀한 국물이 된 아침 밥상, #. 이러면 됐지 가뭄 걱정일랑 하여 무삼하리오, #. 포동 하..

소토골 일기 2022.05.31

5월 건달 일기,

#. 초로의 의사가 건네 준 목숨 연장 교지를 받들어 보다가 오늘이 5월하고도 하순의 날들임을 알아낸다. #. 5월의 푸른 날들을 허투루 도둑맞은 것 같다. #. 바람 속에 찔레 향기 어지러운 날들 게으른 밭가의 망초 지칭개들이 제 몸 가장 높은 자리에 꽃 한 송이씩 공손하게 받들고 서 있는 한 낮, #. 목욕물 버리다가 애 까지 쏟듯 그렇게 버려진 해바라기 씨앗이 모둠지어 치솟길래 집 오름길 옆으로 자리를 바로 해 주었다. #. 뙤약볕 이글거리는 8월쯤 더운 허공 속에서 정연한 치열로 익어갈 게다. #. 부처님 손바닥 위를 맴도는 손오공처럼 작은 터전을 맴돌아 씨 뿌리고 가꾼 날들 성실했던 5월의 푸른 날들이 여리고 푸른 작물들로 장하게 자랐으니 그만 좀 쉬어 가기로 하여 #. 몸 푸르던 시절 이 산 ..

소토골 일기 2022.05.24

그래서 小滿,

#. 길이가 짧은 비닐하우스는 여러 날 용을 쓴 끝에 어쨌든 마무리되었으므로 길일의 날을 택해 공손하게 고추 심었다. #. 이제 산골짜기 코딱지 텃밭들은 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얼갈이며 온갖 채소들을 오동통 키워냈으므로 푸르게 가득하다. #. 그래서 小滿이다. #. 종종걸음으로 쉴 틈 없던 사이 다섯 달 넘도록 준비해온 시골동네 공모전 하나를 마쳤으므로 #. 숨 고르기도 할 겸 잠시 약 취한 바퀴벌레처럼 발라당 쉬기로 한다. #. 그러나 또 이걸 마쳤으므로 저걸 준비해야 하고 저걸 마쳤으니 다시 이걸 해야 하는 한 해 길이로 맺히고 이어지는 일들, #. 시골살이 진정한 휴식은 어쩔 수 없이 일 속에 있는 것임을 이제 알아가니 #. 미명의 새벽 이슬 함초롬한 밭고랑을 어슬렁 걸으며 따듯하게 둘러보고 어루만져..

소토골 일기 2022.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