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916

세미 겨울,

#. 구월의 서른 날이 지던 날, #. 달력에선 시월이 기다리고 문 밖에선 겨울이 대기 중인 산골짜기, #. 세미 겨울 쯤? #. 신 새벽 창문을 여니 잔뜩 옹크린 시월이 시린 발걸음으로 성큼 들어섰다. #. 갈색 그리움 먼저 가슴에 뛰어들고도 이쯤에도 자꾸만 시려 드는 마음, 가슴 저림은 또 어떻고, #. 별 것 아닌 일에도 찔끔 울고 싶어지는 참 인간적인 시월, #. 또로록~ 문자 하나, 겨울보다 먼저 독감 침공이 예상되니 모두들 예방 주사를 맞으시라는 전갈이나, #. 독감보다 더 급한 그리움 예방 접종, #. 기어이 서실 동무들이 쳐들어 오겠단다. 다시 뭉쳐야 한다는 거다. #. 그러나 이미 서(書)까지의 선에서 마음 정한 일, 예(藝)까지의 길은 그대들만 가시게나 #. 전 국민이 집 밖에선 마스크..

소토골 일기 2022.10.01

어수선 대수선,

#. 찬 이슬 내리고 아침은 시리다. #. 이렇게 숲 속의 나무들이 수척해지고 들판이 비워지고 나면 겨울이 불쑥 점령군 처럼 들이닥치는 산골, #. 서 산 눈시울이 붉다. #. 하수구와 싱크대의 연관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고단한 목공 일에 멱살 잡혀 여러 날 째 톱질 중, #. 아무리 잘 박아도 못 박기, 잘 뽑아도 못 뽑기, #. 날마다 설거지는 사은품, #. 백수의 팔자가 참 버롸이어뤼 하도다. #. 퇴직 후 몇 해 깍두기 일을 하던 후배의 전화, -이제 완전 백수를 시작하겠습니다. -넌 이제부터 주겄따. #. 이 친구가 도대체 어떻게 이 산 중에 올랐는지 아내의 화분 속에 어느 날 꽃 한 송이 피었는데 제법 예쁜 얼굴에도 새촘이 가득하고도 한사코 통성명을 거절, 손전화를 코 끝에 들이대면 이름..

소토골 일기 2022.09.21

평캠 팔자,

#. 김장 배추밭을 김장 무 밭으로 바꾸었다. #. 유해 조수 피해 신고를 하면 총을 들고 와서 해결해 준다고 너도나도 한 마디씩 했지만 뭘 그렇게 까지, #. 유해? 다분히 사람 중심적 표현이다. #. 한마디씩 한 사람들 마다 가을에 배추 열포기씩 내놓으라고 쐐기박기, #. 건조기의 기름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넋 놓고 가동한 결과 다시 기름을 넣고도 경고음만 요란할 뿐, #. 한나절을 주물러 터친 끝에 해결은 되었으나 딴 일로 잠깐 자리 비운 새 여과기를 통해 새어 나온 기름량이 제법이라서 #. 올해는 엄청 비싼 고춧가루를 먹게 생겼다. #. 그리하고도 추석을 지낸 날부터 하수구가 막혀 요지부동, #. 집 지은 지 스무 해가 넘었으니 사람의 동맥경화처럼 하수구 경화증이다. #. 임시방편의 기구와 방법이..

소토골 일기 2022.09.16

낮은 자리 아주 작게,

#. 아내가 도회 모임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홀로 산골에 남기로 한다. #. 쉬고 잘 곳이 정해져 있음에도 어두울 무렵부터 시작되는 객창감 이거나 미아의 고립감, #. 정 깊은 이들의 눈빛과 손길을 잡고 있음에도 도대체 삼투되지 않는 가로등 밝은 도시의 밤, #. 처방 불가의 산골병이다. #. 명절이 끝난 날 모두들 우르르 모였다. #. 소란한 틈새를 빠져나와 뜨락을 어지렁거리다 보니 밟고도 지나쳐 버릴 만큼 낮게 엎드린 꽃들, #. 아주 낮은 자리에 아주 작은 모습으로 핀 꽃들은 향기조차 너무 작아서 세속의 코로는 맡을 수가 없었다. #.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것들과 너무 큰 것들,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소리들과 너무 큰 소리들이 분명히 있을터이니 사람의 감각으로 정한 크기란 아무 ..

소토골 일기 2022.09.12

추석 고요,

#. 벌초를 끝내고 미리 명절 차례 올렸다. 말하자면 One stop 으로··· #.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조상님 혼령께서도 귀신 같이 아실 일, #. 딸만 둘인 며느리는 명절 때마다 친정어머니께서 홀로 계셔야 하는 것, #. 명절이 두 번이니 추석엔 친정으로 가도록 하였다. 두 번 다 가도 괜찮고··· #. 배추 모종을 두 번씩 이나 심었지만 고라니만 두 번씩 이나 횡재를 했으므로 그 빈자리에 다시 무 씨앗을 넣었다. #.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를 만나는 황홀한 산골, #. 모든 것이 기적이다. #. 여름 지나도록 추녀 끝에서 수박덩이만큼 여물어 가던 말벌집을 야음을 이용하여 떼어냈다. #. 갑작스러운 횡액으로 벌집 가득 우왕좌왕하던 생명들, #.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여전히 지난하다. #. 바람과 ..

소토골 일기 2022.09.09

구월 아침,

#. 구월, 느낌부터 참 가을스럽다. #. 아침마다 다시 심어 놓은 윗 밭의 배추 안부 여쭙기, #. 배추가 김장으로 치장하여 밥상에 오르기까지 #. 마당쇠 노릇 참 만만치 않다. #. 아장걸음을 걷던 당랑이 제법 의젓해졌으므로 초록은 다소 수척해 보이는 아침, #. 여전히 비 오시는데도 저 아래 너른 바다에서는 힘쎈 태풍 하나 열심히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 #. 산골 뜨락에 물 마를 날이 없다. #. 어쨌거나 세월 가는 대로 하늘은 푸르고 가을은 맘껏 물들어서 다시 이 가슴조차 알록달록 물들 테니 #. 그저 작은 일상들에 성실할 일, #. 허공이 꼬옥 움켜쥔 밤송이들, #. 가을이 온통 토실하겠다.

소토골 일기 2022.09.05

그렇게 가을,

#. 아침 운동 길이 춥다. #. 조금 늦었거니 온몸에 통증이 생기도록 심은 배추 모종이 이제 뿌리를 내렸으려나... 올라가 보니 고라니 께서 하나도 남김없이 뽑아 먹었더라 #. 올 김장은 고라니 절여서 해야겠다. #. 다시 뽑아 먹은 만큼의 배추 모종을 심은 뒤에 전기울타리를 손질해서 가동하고도 밭가에 밤새워 수다스러운 라디오를 켜 두기로 한다. #. 해마다 때마다 되풀이되는 이 수세적 노고와 허탈을 어찌해야 하나? #. 인도 여행 후에 서로가 서로를 엮어 놓은 모임 하나, 이 여름 다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고 염불에 염불을 하다가 결국 내 집에서 만두 모임이 되었다. #. 막내인 숙 선생조차 흰머리가 성성하니 장차 어느 날 또 갠지스 강가에서 시바를 뵈올꼬? #. 본격 시골살이 전 답사를 위해 들..

소토골 일기 2022.08.29

비와 번개 사이,

#. 어떻게든 비를 뿌리기로 작정한건지 찔끔 비가 내리기도 하다가 요란스런 뇌우를 퍼 붓기도 하더니 #. 모처럼 햇빛, #. 그래 봤자 고추 널기 좋겠다는 생각뿐, #. 줄에 묶인 강아지처럼 내 의식의 고갱이조차 산골 일상에 묶이고 만 것, #. 비 속에 함부로 젖어 있던 홍화가 제 몸 가장 높은 자리에 꽃 한 송이 받들어 평화로운 한 낮, #. 금빛 햇살 꽃으로 피어 온통 향기, #. 생일이었다. 한 해 가족 모두의 기억해야 할 날들을 빼곡히 정리하면서 정작 나를 위한 날들은 빈칸으로 두었었다. #. 발병과 재발을 거친 십 년, 주변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아주 가끔 이렇게 꾸역꾸역 살아 있어도 되나 싶었었다. #. 치료하는 동안과 치료 후의 후유증까지 이런저런 통증들을 잘 견딜 수 있었던 건 내 몸에 ..

소토골 일기 2022.08.19

가을 예감,

#. 잠 깨인 새벽 누옥의 낮은 추녀 끝에 헝클어져 쏟아지는 낙숫물과 환청 같은 빗소리, #. 문득 온몸으로 느껴지는 깊은 고립감, #. 가뭄 건너 장마, 그리고 폭우, #. 이 몸 어딘가에 아가미 하나 생길 것 같은 질척한 물기 그렇게 입추가 지났으니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불쑥 가을이 될 것이다. #. 풀들은 산발하여 허공 춤을 추다가 제 풀에 누워 버렸고 햇볕 담아 익어야 할 작물들 조차 물에 잠긴 듯 볼 품이 없다. #. 첫새벽 잠길에 소슬한 추위가 느껴지니 이제 긴 옷을 입어야겠다. #. 윤기나는 건물들이 마천의 높이로 솟아 있는 도시의 피해 소식, 밤마다 불빛 휘황하던 거리는 함부로 젖고 구겨진 채 망가져 버렸으니, 문화 또는 문명으로 이름 지어진 사람의 일들은 얼마나 표피적 인가? #. 반지하..

소토골 일기 2022.08.11

가을로 가는 길,

#. 서가의 책들은 곰팡이 냄새가 풀풀 나고 성냥갑 만한 제습기 한대가 연일 비짓 땀을 흘려 가며 집안 구석구석을 쥐어짜 봐도 온갖 것들이 여전히 눅눅 질척한데 영상으로 건너온 이제 열 달짜리 걸음걸이만 제법 뽀송해졌다 #. 겹겹의 푸른 껍데기를 끌어안고 붉고 선연했던 꽃술은 시름없이 늘어져서 이제 옥수수의 치열이 오동통 정연해졌으므로 육칠월 건너온 푼수떼기 풋날들을 나날이 삶아 먹고 구워 먹고, 빈대궁은 전리품으로 모아 모아 추운 훗날까지 보존하기로, #. 유리 조각 같은 햇살 속에 매미들은 다시 날카롭게 울고 하늘 가득 허공보다 가벼운 잠자리, 들, 제 아무리 더워도 어쩔 수 없이 가을로 가는 길이다. #. 중복이 지난날, 개발 괴발 전지 한 장의 붓글씨 끝에 지난해부터 벼르기만 하던 부채 꾸밈을 마..

소토골 일기 2022.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