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입동기(立冬記)

햇꿈둥지 2021. 11. 8. 18:49

 

 

#.

구들방 구석을 비집어 

하염없이 새던 연기는

몇 날 며칠 입막음 끝에

겨우 틀어막았다.

 

#.

가끔 이렇게

스스로도 감탄할 만큼

장한 일을 해낸다.

 

#.

삼시 세끼 더운 밥상을 준비해 주던

누추한 산골 부엌은

사실은 며느님 수라간이었는지,

 

#.

집 나서기 며칠 동안

이걸 굽고 저걸 끓이고

지지고 볶고···

하여

바리바리 짐을 진채

 

#.

감기로 불발을 연속해야 했던

난생 처음 손녀와 눈맞춤을 위해

서울행,

 

#.

지금 엉금엉금 엉키어 흐르고 있는 윤기 나는 차들이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미친 속도로 달릴 수도 있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들,

 

#.

숨 막혀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10미터쯤을 굴러갈 수 있는 길 위에서

100킬로미터의 규정 속도를 준수하라는

철딱서니 없는 내비게이션,

 

#.

그렇게 겨우겨우 도착하여

반짝 상견,

 

#.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토록 예쁘다고 칭찬했건만

그저 입 꼭 다문채

말 한마디 없이 새촘 가득한 지지배를,

 

#.

탈출하듯 도시를 떠나 다시 산속에 드니

입동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장맛비 찜 쪄 먹게 쏟아진 가을비에

하염없이 쏟아져 누운

봄부터 여름 지나 가을까지 무성했던

나뭇잎

나뭇잎들,

 

#.

새들은 고체 상태의 바람이다

책들은 고체 상태의 침묵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옛날에 대하여에 나오는

맛깔스런 언어를 빌려

····낙엽은 고체 상태의 기억이다...라고

고쳐 쓰고 싶은

 

#.

입동 후

비 오시는 저녁,

 

#.

겨울 깊은 날들을 빌려

고체 상태로 압착되어 있는 책들의 침묵조차

조심조심 깨워야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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