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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였다.
사람의 마을은 깊이 가라앉아 고요하고
등짝 큰 산들은 허공에 둥실 솟아 명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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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왕조의 지폐처럼
폐기되어 버린 낙엽들만 무수한 뜨락에서
세월은 또 하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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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꼬리와
겨울의 머리가 뒤섞여 헝클어진
혼재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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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의 사람에 의한
몇 번의 전화를 받았다.
아주 오래 전의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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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내가
누군가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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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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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게 생긴 아이들이 왔다고
짜장면 집 아줌마가 참깨를 넉넉히 뿌려 주었는데
통참깨가 낯선 정우의 "이게 뭐지?"에 대하여
"몸에 좋은거야"라고 한방에 제압해 버린
다섯 살 정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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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돌 보는 일
참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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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해도 끝이 없는 주변 정리 일들
봄부터 여름 지나 가을 건너기까지
끝없는 게으름을 늘어놓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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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하루는
길이를 잴 것조차 없이 짧아서
일어나서
몇 걸음 동동거리다가
길게 누운 산 그림자에 걸터앉아
아궁이 가득 불 들이고 나면
이내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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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에 다시 비 오시고
기온이 급 강하할 거라는 입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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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 고구마 몇 개를
여의주처럼 끌어안고
아랫목 이불 섶을 들추어 누우면
하룻밤 꿈길이 따듯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