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풍경소리 850

식사 하세요

#. 매일 그렇고 그런 백수의 날들 바쁠게 뭐 있나?... 어정 걸음으로 절대 뛰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는데 #. 첫 번째, 이곳으로 이사를 결심한 딸아이는 살던 집을 비우고 이사할 집에 들기까지 한 달의 공백을 만든 뒤에 온 가족이 전국 캠핑 여행을 하다가 일주일쯤은 함께 지내기로 하는 풀 행복? 기간을 준비해 놓았다. #. 두 번째, 덫에 치였던 고양이는 아내의 지극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만에 곱게 묻어주어야 했다. 49재가 며칠 남지 않았다... #. 세 번째, 보낸 고양이에 대한 슬픔을 위로한다고 태어난 지 일주일 된 아기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하기로 했는데 며칠 뒤 급한 전화가 왔다 그 집의 어미 고양이가 덫에 치어 죽었다는 것, 이놈의 동네... #. 네 번째, 이 정신 사나운 통에 바둑..

풍경소리 2020.11.18

혼재 계절

#. 해 넘이부터 아침이 되기까지는 겨울, #. 금빛 햇살이 찰랑대는 한낮은 가을, #. 어수선한 산 속, 겨울의 머리와 가을의 꼬리에 매달려 흔들리는 동안 #. 하염없이 낙엽 지고 속절없이 세월 가고, #. 문자 하나 도착 할 때 마다 코로나 환자 한명씩이 늘고 있다. #. 가만히 산 중에 들어 앉아 나날이 세상에 대한 경계를 키우는 일, 사람의 일들은 오늘도 불안하다. #. 코로나에 갇히고 노환의 영감님 수발로 발이 묶인 붓글씨 도반님 댁을 찾아 김장 김치 한통을 나누어 드렸다. #. 어수선 난국이라고 문간마다 체온을 재기만 할게 아니라 체온 담긴 사람의 정이 나누어져야 할 때다. #. 푸른 바다를 떠나 푸른 하늘 아래 몸을 매달아 가을처럼 건조하게 말라가는 #. 명태 였다가 코다리 였다가 이제는 북..

풍경소리 2020.11.15

聖, 俗의 무의미한 경계

#. 뒷 산 능선이 헐렁해져서 산 너머 갈기 세운 바람이 맘 놓고 넘나드는 날들, 나날이 표창 같은 서리가 내리고 있으니 두서없는 일들에 발만 동동 거리다가 #. 일탈이다. 마늘 밭을 다독이고 고추를 다듬어 김장 준비가 여전히 진행 중 임에도 흙 묻은 손을 씻고 잠시 바람의 길을 오른다. #. 긴 세월 땅 속에 묻혀 세상을 관조하시던 오백나한을 기어이 햇볕 아래로 모셔 놓고는 천상의 표정으로 여전히 온화한 석상 사이로 철없는 관람객들만 분주했다. #. 오로지 먹고사는 일 하나를 위해 온몸으로 성실해야 했던 민초들의 삶을 굳이 속(俗)으로 구분하면 깨달음은 훨씬 더 성스러운 경지가 되는 걸까? #. 그 무의미한 경계, #. 석상의 표정마다 스며들어 있는 오랜 시간 석공의 공력은 신앙보다 거룩하다. #. 때..

풍경소리 2020.11.11

기습 겨울,

#. 달빛 흥건한 새벽, 바람 불고 번뜩이는 서리 내리더니 입동 앞 세워 겨울이 진주해 있었다. #. 마당가 나무들 여름 지나 가을 깊도록 무성했던 잎들을 속절없이 떨구어 제 발등만 덮고도 추위 앞에 의연해서 사람의 일들을 민망하게 한다. #. 뿌리 짜임이 하도 옹골져서 수 없는 도끼질에도 끄떡없던 고주박 하나를 어르고 달래어 한나절 만에 겨우 땔감으로 만드는 일, #. 쪼개어진 모두를 아궁이에 넣어 구들이 달구어지면 도끼질로 묵근해진 허리 지짐이나 하면 되겠다. #. 시골살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는 게 없으니 억지 부릴 일 아닌데도 어떤 일이든 시작을 하면 끝을 본 뒤에야 손을 털게 되니 이 또한 시골 중병이다. #.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해 치우느라고 일이 없으면 어떻게든 일거리를 만드느라고 종종 ..

풍경소리 2020.11.07

세월, 11월

#. 새 교과서를 받아 든 아이처럼 새해 달력 첫장을 열었었는데 어느새 11월, #. 감동도 열정도 없는 그저 그런 시간들이 또 둔중한 몸 위에 쌓였다. #. 가는 시간은 깃털 같고 지난 세월은 바윗덩이 같다. #. 겅중겅중 건성으로 살다 보니 주변 잡동사니가 그득도하거니와 정신조차 혼몽하여 조금 전의 일도 명료하게 기억하지 못하는데 #. 세월은 참 구체적으로 흘러서 뿌린 씨앗들이 잎이 되고 꽃이 되고 열매가 되기를 단 하나도 거르지 않는 섬세함. #. 구체적인 열매들을 거두어 건성으로 김장을 하고 나면 구체적인 겨울이 되어 구체적으로 눈을 뿌릴 것이다. #. 거울 앞에서 내 이름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아주 낯선 보통명사로 느껴지는 의식의 둔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 구체적 구체적 도대체 구체적으..

풍경소리 2020.11.03

불현듯 소풍,

#.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죽을 것 같아 너를 보면 나을 것 같으니... #. 병상에 누워 한 시간 가량 진행되는 고문 같은 청력 검사가 끝날 때쯤 엄살이 덕지로 붙은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 어머니 치매 간호로 지쳐 빠진 친구가 파도 위에 누운듯한 바닷가에서 보낸 구조 신호였으므로 #. 밤 길 세 시간을 달려 그의 엄살을 기꺼이 위로하기로 하였다. #. 반쯤은 지난 시간의 얘기들과 다시 반복되는 이야기를 간증처럼 쏟아내기도 하는 그의 옆에 누워 가만히 혼절해 버린 바닷가 작은 방, #. 지난주까지도 그토록 화려 했다는 알록달록 오색 계곡의 단풍 길은 이제 얼룩덜룩한 갈색 길이 되어 있었으나 #. 바람 부는 산 길에서 서실 도반님을 조우하였기에 서로 손 잡아 알록달록 환호하였다. #. 고기 잡는 아버..

풍경소리 2020.11.01

가나안 신자

#. 아침 운동 후 사방을 둘러 공손히 합장하여 인사한다 #.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춘사와 죽음 까지도, #. 내 안과 밖으로 칭칭 감겨 있던 다분히 인간적인 신앙의 끈을 거두어 버린 날부터 그리고 직거래를 선언 하기까지, #. 교회 안에서의 태산 같은 엄숙과 막연한 경건은 감당하기 어려웠고 #. 미사 중 가슴을 두드리는 통회 때마다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는 허리 굽고 어깨 좁아진 노인들 모습을 보면서 울컥 할 때가 많았다. #. 몸이 부서지도록 살아온 저니들의 한생은 이미 신앙만큼 거룩하다. #. 교회의 안과 밖을 교의적 당위로 구분하여 허리 굽고 관절 망가진 이들이 수십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일은 고행이다. #. 그리하여 신자 정년제가 필요하다. #. 재너머 마을에서 비닐하우스 해체 작업을 같이 하던..

풍경소리 2020.10.18

무량가을,

#. 고추 말림용 비닐하우스 한 동을 지을 궁리로 건너 마을 아우에게 이러저러한 크기의 중고 비닐하우스 자재를 구 할 수 있겠는가 물었더니 어제 문득 전화하여 재 너머에 비슷한 크기의 비닐하우스 세동이 있는데 셀뿌로 철거해야 한다는 기별, #. 작업 할 곳에 도착하여 보니 아담한 흙집도 철거해야 할 비닐하우스도 설치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 연유를 물으니 귀촌한 주인 양반이 갑자기 병이 생겨 급히 팔고 치료를 위해 떠난다는 것, #. 함께 일을 하는 아우는 허리를 펴고 쉬는 종 종 요따우 푸념을 쏟아냈다. #. 뉘기는 암 치료를 위해 비닐하우스를 버리고 정신 나간 두 암 쟁이는 비닐하우스를 옮겨 짓겠다고 가을 햇볕 아래 생똥 쌀 고생을 하고, #. 온 몸이 물에 가라앉는 듯 힘들었던 밤 깊은 ..

풍경소리 2020.10.14

한바탕 꿈,

#. 산색이 나날이 푸석하고도 뒷 산 정수리가 조금 헐렁해 보인다. #. 날 세워 불끈 일어선 바람결에 추녀끝 풍경이 자주 소란하다. #. 살짝 감기 기운이 있어 비타민 씨가 많다는 풋고추 몇개를 상에 올렸더니 비타민 씨는 보이지 않고 고추씨만 하나 가득, #. 티비 받침장 맑은 유리문이 식상하여 종이 하나를 붙이고 그 위에 써 넣기를 #. "한바탕 꿈" #. 아내의 손전화는 세상 소식을 고자질 하는 일로 시끌벅쩍 바쁘다 그 소리들에 무관심 시큰둥한 내게 "당신은 세상 일이 궁금하지 않나?"인데 #. 내 세상이란 이미 바람과 구름과 산과 그리고 당신 뿐 이라는 현답, #. 성질 급한 나뭇잎 하나 알록달록 치장을 마치고는 작은 바람결에 팔랑 산골 뜨락에 누으므로써 #. 본격 가을이 배달 되었다. #. 추석..

풍경소리 2020.10.06

하이브리드 태양초

#. 비 속에 거두어진 첫 거둠 고추들은 어쩔 수 없어 건조기로 말려야 했다. #. 두 번째 거둔 고추는 반쯤은 건조기로 그리고 나머지는 햇볕 말림으로, #. 문제는 말라가는 고추의 향기는 물론 마른 모양도 차이가 있다는 것, #. 그리하여 세 번째 거둔 고추들은 몽땅 볕 좋은 지붕으로 올라가 오로지 햇볕 말림을 하겠다고 흐린 하늘 잠깐 소나기라도 지날 양이면 동춘서커스 곡예 단원처럼 사다리 오르내리기를 하는 중, #. 고추 전용의 비닐하우스 하나를 지어야겠다는 생각 꿈속에서도 옹골지다. #. 어쨌든 며칠 하늘은 푸르러서 햇살은 또 셀로판지처럼 투명했으므로 아내의 소원대로 고추는 말라가고 있는 중, #. 시대적 트렌드에 맞추어 올 추석에는 가지도 오지도 말자고 모두에게 알렸으나 길고 긴 연휴에 딱히 할 ..

풍경소리 2020.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