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여름 끝날의 깨우침

햇꿈둥지 2006. 8. 14. 08:19

 

 

아내가 퇴원 하던 날

탤런트 뺨치게 잘생긴 젊은의사는 자상 하기도 하지

요건 요롷고

조건 조래서

요건 요롷게 했고

조건 조롷게 했으므로...

장황하게 구사되는 전문 의학용어에 일찌감치 주눅이 들어 버린 나는

 

"하여튼 잘 고쳐 졌다는 말씀 이지요?  조심해서 잘 쓰도록하겠습니다"

건성의 인사로 퇴원을 했다

 

마누라는

월남에서 돌아 온 김상사 처럼 팔굽 고정 장치를 어깨에 메고 소토골로 돌아 왔다 

다섯마리의 개들은 어깨가 고장이 나거나 말거나 어쨌든 돌아 온 밥집 아줌마 반기듯이 일제히 길길이 뛰며 좋아했다

 

의사는 그랬다

 

"수술 효과가 반, 나머지는 본인의 노력과 주위의 재활 운동 지원에 의해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까잇거 뭐 해 주면 될 거 아니냐

 

자신만만하게 재활 운동 지원의 열의를 불 태우며 돌아 왔는데

 

금요일 저녘,

아들넘과 딸넘의 친구들이 몰아 닥쳤다

윗 밭에서 호박을 따고 호박잎을 따서 데치고 된장 찌게를 끓이고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어대는 그 녀석들 틈에서 나는 의기양양 하다

 

가사...라는 거 그거 참 재미있는 일 이로구먼

 

설겆이를 하고 늦은 저녘에 잠이 들었다

창 밖이 뿌옇게 밝아 오는구나

종 전 같으면 이슬 내린 뜨락을 거닐며 이꽃 저꽃을 둘러 보거나 제법 의젖하게 자란 나무들을 둘러 보거나...였었는데...

 

밥을 앉혀야 하는구나

쌀 씻어 물 맞혀 밥 짓고

반찬은 무얼해야 하나 고민 하다가

새우젓 넣어 호박도 볶아 놓고(음~ 좀 짜구나...마수거리에 이 정도로도 훌륭하지...얘들아 짜거든 물 말아 먹그라~)

미역국도 끓이고

감자도 볶아 놓고

날치알 살짝 넣어서 계란찜도 해 보고

생물 꽁치 손질해서 무우 썰어 밑에 깔고

감자 썽둥 썽둥 썰어 넣고

청양고추도 어슷 썰어 자글 자글 끓여내니

맛은 쥑이는데 맵다?

입 안이 매우냐?

나는 손끝이 맵다...

햇살 퍼지기 전 인데도 렌지의 열기로 땀이 비오듯 한다

 

아귀 같은 이놈들은 일제히 밥그릇을 비움 으로써

음식을 담았던 숫자 만큼의 그릇들은 설겆이 그릇으로 둔갑을 해서 내 앞에 쌓였다

 

허리가 끊어지도록 설겆이 하고 났더니

딸놈은 새로 씻은 컵을 꺼내다가 커피를 타고 있었다

코 끝에 커피향이 감돌기 전에 설겆이 걱정부터 되었다

 

어쨌거나 딸놈은 공식 간병인으로 지정이 된 상태니 다소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어필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차 한잔을 마시고 나니 이내 점심 시간이 되었다

쌀 씻어 앉히고 반찬을 만들고...

 

이거 뭐 손에 물 마를 새가 없구만...

 

이렇게

또 저녘을 지어 먹고 설겆이 하고

이걸 하고

저걸 하고

 

이 정신없는 틈새에 다정도 병 이지

집 아랫 밭에 배추를 심은 이장 마누라는 배추를 잔뜩 뽑아 주고 갔다

 

이걸 다듬어 절이고 씻어서

마늘 까고 액젓에 갈고

고춧가루 넣고

이양념 저 양념 후에 겉절이로 버무려 놓았더니

 

느무 느무 맛이 있어서

김치의 개념을 새로히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나 뭐 라나...

 

헤벌쭉 입이 벌어지기 보다는

앞으로의 난관들이 훠언히~ 눈에 그려 지더라...

 

 

평소에

"여자가 말야 집에서 뭐 그리 바쁜 일이 있다구..."

 

요것 좀 수정 해야겠다

 

지금은 집을 공식적으로 탈출해서 사무실에 있다

천국이 따로 없다

즐거운 마음으로 열씨미 일을 해야겠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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