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상원사 오름길에 있는 서낭당
원래 성황당 이라는 명칭은 중국 고대 성읍의 수호신인 성지신(城地神)에서 유래 하였다고 하며 지방에 따라 서낭당, 할미당, 천왕당 등 다채로운 명칭을 갖고 있다
고려 때에 전해져서 조선시대에 크게 성 하였으나 오늘날은 문명 이라는 이름으로 경향 각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발 행위에 밀려 곳곳에 그 자취가 남아 있을 뿐이며 신목, 돌무더기, 당집 등의 형태로 잔존해 있다
마을에서 다소 떨어진 앞에 위치한 성황림이며 옆에 내가 흐르고 중앙에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농토(農土) 가운데 남아있는 온대지방의 낙엽활엽수림(落葉闊葉樹林)과 함께 전나무를 포함하여 많은 종류의 수목이 자라고 있으며 10여 그루의 복자기가 서낭당을 둘러싸고 있다.
고요한 산중에서 살고 있는 화전민(火田民)들은 자연을 의지하여 삶을 유지하여 왔다. 이 근처의 70호 남짓한 주민(住民)들은 치악산(雉岳山)의 성황신(城隍神)을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라고 믿으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다.
매년(每年) 4月8日과 9月9日에는 돼지나 소를 잡고 떡과 술을 빚어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자정(子正)을 전후하여 달이 지기를 기다려서 제사를 지내며 상을 당하거나 궂은일이 없는 사람들이 제주(祭主)가 되며 제를 지내는 동안에는 부녀자(婦女子)와 어린이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이 때에 각 가장(家長)들은 각기 소지를 올리면서 1년 동안의 행운(幸運)을 기구한다.
과학(科學)의 발달로 이러한 행사가 점차 줄어들고 있으나 마을 사람들의 단합행사의 하나로서 새로운 각광(脚光)을 받기도 한다.
[어느 님의 블로그에서 쌥쳐다가 군데 군데 개칠도 했음]
최근 전원 주택의 바람, 주오일제 근무에 편승한 펜션의 확대 개발로 이곳 성남리 일대에도 매표소까지 도로가 신설되어 주말에는 대형 버스가 밀물처럼 몰려 들고 있으니
서낭의 신목 아래에서 정한수 떠 놓고 치성을 드리던 일들은 이제 전설 속의 얘기들이 되고 말았다
하룻 밤 하루 낮을 내린 봄비로 물골마다 수량이 넉넉하다
저 넘어 운무 거느린 치악이 산색 단아하게 치장하고
성큼 품안으로 뛰어 든다
서낭의 치성에도 부족함이 있었는지...
아직
발 걷어 물에 들기는 시리고도 남을 일이건만
물 가운데 앙증맞은 돌탑 하나 초록 깊어가는 하늘을 바치고 서 있다
상원사 매표소를 막 지난 자리
저 먼 산 꼭대기 부터 흐르기를 시작한 맑은 물들이
소를 지나 흰 포말로 성 내어 흐르고 있다
내 나라에서 태어나
어미의 품 같은 내 나라 땅을 밟아 오르고자 할 뿐인데
그 초입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매표소,
[무단으로 출입시에는 벌금 000...]라는 잇빨 세운 경고문을 보다가
호젓한 산중에서 화적떼를 만난듯 해 실소를 머금었다
성남리는 원래 원성군 석남리 였다고 하나 성황당 때문에 이리 변천 하였는지
요즘의 행정 구역상 지명은 성남리 이다
서낭의 구성도 이 그림의 숲속에 있는 서낭각을 포함하여 큰서낭 작은 서낭으로 나뉘어 있다
민박과 펜션이 넘치도록 들어 서고 있는 한켠에
오래 전에는 물레방앗간 이었는지...
버려져서
더러는 흙벽의 속 뼈대를 들어내 보이며 쓰러져 가는 집 한채가 있다
화전민 이었거나
논이라고 해 봐야 하늘에 목 빼물어 늘어진 메뚜기 이마빡 만한 천수답이 전부였을 이 터전에
한 여름
비명 같은 매미소리 속에서 한가롭게 돌았을 물레방아를 아득히 그려 본다
헐렁한 베잠방이를 일상복으로 입었을테고
손매디 부르트도록 돌을 골라 담을 쌓고
그렇게 만들어진 터전에 옥수수며 감자를 심어 연명했을 사람들...
입성 번지르 하고 번뜩이는 차를 타고 들이 닥친 이방인들은 말한다
"참 물 맑고 공기 좋으네요...전원 생활을 하기에 그만인 곳 입니다..."
나무 한 짐을 마련해서 신새볔 지게에 걸머지고 저잣거리로 나갈라 치면
뱃고래에서 공복의 울림이 우뢰와 같았을 터...
세상 좋아진게야...
그노무 공기 좋고 물 맑고...
제 손가락이 다 닳아 빠지도록
기둥을 세우고 석가래 얹어 비바람 막도록 애 썼을 저집 주인
세월은 돌덩이 보다 무겁게 쌓여만 가고
흙벽은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데
황톳빛 얼굴에 주름 깊어졌을 그 사람들
지금은 어느 곳에서 가슴을 허물어 가며 살아 있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