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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었던 자리마다
허공이 갈무리되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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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하고도 새벽까지 비 오시니
메말랐던 들판에
찰진 초록이 넘실 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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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 헤어지기로 결심한 용기 있는 이가 있었다
그녀의 만용 같은 용기나 부러워하면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몇이
그녀의 무너진 사랑탑 주변에 둘러앉아
축하한다고
막국시 한 그릇씩 말아 묵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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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동네 한가운데 들어 있는
막국시 집 양철 지붕이
제법 거친 비로 소란 소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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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비 오시고
다시
가로등 듬성한 거리의 찻집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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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개떡 같기도 한
서로의 생애를 규탄하는 절차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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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이
거룩하게 쫑 났음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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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탓에
아랫 밭과
윗 밭과
마당가 코딱지 밭과
마을 모든 밭들이 유기되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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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빈둥 먹 갈아
붓글씨라도 쓰는 일이
가장 잘한 일이 될 것 같아
아직도 설중매가 피고 있는 어느 시인의 글귀를
혈서처럼 새기다가
커피 한잔 들고 낙수에 눈길을 걸어두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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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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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가려진 좁은 곳에
날씨 아랑곳없는 나비 한쌍
깊은 정으로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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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이 없어
보낼 일 없으니
철없는 연서라도 한 장 써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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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