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비 때문이다

햇꿈둥지 2020. 7. 13. 10:25

 

 

#.

꽃 피었던 자리마다

허공이 갈무리되는 시절

 

#.

밤새 하고도 새벽까지 비 오시니

메말랐던 들판에

찰진 초록이 넘실 넘실,

 

#.

만년에 헤어지기로 결심한 용기 있는 이가 있었다

그녀의 만용 같은 용기나 부러워하면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몇이

그녀의 무너진 사랑탑 주변에 둘러앉아

축하한다고

막국시 한 그릇씩 말아 묵는 동안

 

#.

촌동네 한가운데 들어 있는

막국시 집 양철 지붕이

제법 거친 비로 소란 소란하였다.

 

#.

여전히 비 오시고

다시

가로등 듬성한 거리의 찻집에 앉아

 

#.

참 개떡 같기도 한

서로의 생애를 규탄하는 절차 끝에

 

#.

그 결혼이

거룩하게 쫑 났음을 선언하였다.

 

#.

비 탓에

아랫 밭과

윗 밭과

마당가 코딱지 밭과

마을 모든 밭들이 유기되어 있으므로

 

#.

빈둥빈둥 먹 갈아

붓글씨라도 쓰는 일이

가장 잘한 일이 될 것 같아

아직도 설중매가 피고 있는 어느 시인의 글귀를

혈서처럼 새기다가

커피 한잔 들고 낙수에 눈길을 걸어두는 일

 

#.

하염없어라

 

#.

비 가려진 좁은 곳에

날씨 아랑곳없는 나비 한쌍

깊은 정으로 아름다워라

 

#.

받을 이 없어

보낼 일 없으니

철없는 연서라도 한 장 써 볼까?

 

#.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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