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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이야기

햇꿈둥지 2005. 12. 5. 17:48

 

#.1

햇꿈둥지를 만드는 사람들.

"형님 집에 쥐가 사는게 아니라 쥐 집에 형님이 사시는 거래유"
술 취한 스테파노(세례명, 김영만)의 얘기였습니다.
햇꿈둥지를 시작하기 전, 쥐가 들끓는 집에 살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날 저녁 소주 3병 넘게 비우며 의기 투합한 스테파노와 나의 취기, 거기다 팔을 걷어 붙인 아내의 동조...
햇꿈둥지는 이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치악산 아랫마을에서 우리 가족들이 지어가는 꿈의 터전, 햇꿈둥지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집을 자랑하려는 것도, 시간이 남아 심심풀이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도시에서 오랫동안 공무원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집을 강원도로 옮기면서 이곳서 가장 가까운 곳 이천으로 근무지를 옮겨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보다 좋은 나라, 보다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근면성실한 남자입니다.
도시에서 살다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시골마을로 들어와 땅을 사고 황토집을 짓기까지의 과정(지금도 짓고 있음)이 너무 다사다난(?) 했기에 혹 저와 같이 미친 짓(되돌아 보면 그렇습니다)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저의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글을 올립니다.

치악산 소토골 3,780평의 땅을 구하기 위해 이사를 두 번이나 해야 했습니다.

96년 이 땅에 이삿짐을 들이고 보니 먼저 사시던 분은 개인 사정으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 땅 대부분이 묵밭으로 변해 있었고 당초의 경사를 그대로 유지한 비탈 밭이어서 소와 쟁기를 이용해야만 땅을 갈아엎을 수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4단의 계단을 조성한 정지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투입된 포크레인으로 인해 앞서 소개한 집짓기와 인생의 동지 스테파노(포크레인 기사님으로 이때 인연이 결국은 햇꿈둥지가 서기까지 이어지는 인연이 되었습니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집을 짓는 동안 지겹고 힘들 때마다 스테파노는 푸념을 합니다.
"에이구 그날 소주를 한병만 덜 마셨어도 내가 이 고생 안 했을텐데..."

도시 생활을 하며 주말 시간을 이용한 땅 둘러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한계가 있었습니다.

첫째, 구하고자 하는 땅의 원매자와의 접촉이 불가능하므로 땅의 이력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시간이 충분치 않아 땅의 전체적 조건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해뜨기부터 지기까지의 일조량, 비가 올 때의 상태 등을 말입니다.
셋째, 땅의 참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여름에 땅을 보는 것은 나이 많은 여자의 화장 진한 모습을 흐린 전등 불빛 아래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가급적이면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에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한쪽에서는 살고 한쪽에서는 짓고.

햇꿈둥지의 현재 모습

특히 나는 땅을 계약 할 당시 진입로에 대한 충분한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 소홀에 대한 혹독한 댓가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근래 농가 주택은 허가가 아닌 신고 사항으로 바뀌었으며 지자체 별로 약간씩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나 주택 30평과 부속 창고동을 지을 수 있습니다.

제 경우 주택 30평과 창고 10평 등 총 40평 규모로 대학 시절 공부한 interior design 경험을 토대로 직접 도면을 작성, 시작 했으나 워낙 알량한 실력이라 시공 중 많은 부분이 변경되어 완공 후 도면은 사실 상 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시공 전 아내와 약속한 내용들은 하나, 주변 산세와 어울리도록하고 둘, 건축 소재는 가급적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하되 흙과 돌과 나무를 주 소재로 하고 셋, 내부 구조는 집안에서 술래잡기가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으며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말에 따르고 있으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2

 

구입당시의 부지 모습, 이곳 빈 농가에서 쥐들과 함께 얼마간 살았다.

안양 관악산 자락의 삼호아파트에 살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퇴근 후 집에 가보니 그 날 아내는 요새를 점령한 맹장의 표정으로 득의양양해 있었습니다.
내용 인즉, 작은 방 붙박이장의 문짝을 아이 침대 높이로 잘라 버리고 그 공간에 침대를 놓았다는 것입니다.
훗날 아파트 팔고 이사 할 때 관리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일장 훈계를 들었음은 물론 문짝 새로 달아 주느라고 적지 않은 고생도 했구요.
도시에서 살 때는 그렇듯 거침없이 일을 저지르던 악마 같은 마누라도 황토집을 짓기로 결정을 했던 날 저녁에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여보 집 어떻게 짓지?..."
"주뎅이로 나뭇가지 물어다가 짓지..."

기본 설계는 이랬습니다.
30평 규모의 흙집을 짓되 방 셋, 주방, 화장실 그리고 거실은 주말마다 미어지게 오시는 손님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넓게 하자.
또 허무한 아내의 몸매를 위해 주방과 곁들인 다용도실도 마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허무'는 허리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저 한번 웃어보자 소리입니다만 몇 해 전 아내는 갑자기 다이어트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식사량도 반으로 줄이고 땅 꺼지게 달리기도 하고...
그렇게 몇 일이 지난 어느 날, 뒤늦은 시간까지 폭음에 곤죽이 되어 돌아왔던 날 새벽녘 제 정신을 차린 후 반성 섞은 아첨으로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 당신 허리 많이 가늘어졌네" 했더니 홱 돌아누우며 하는 소리.
"거기 다리여..."
이러니 주방 면적을 고려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골조를 세워놓은 모습.

기본적으로 생태적 촌 기질을 버릴 수 없어 구들방 하나는 꼭 만들기로 했습니다.
터파기야 말씀드린 스테파노(김 영만씨)의 포크레인으로 왕 왕 파 버리면 그만인데 진입로가 협소하고 중간에 90도 이상의 굴곡 지점이 있어 레미콘을 받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상의 끝에 철판으로 만든 2입방 용량의 간이 콘크리트 희석 기구를 임대하고 모래,자갈, 시멘트는 2톤 덤프 트럭으로 실어 올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 때문에 장비 임차비며 인건비 등이 더 들었지요.
혹시 제가 집 지은 근처에 같은 공사를 하실 분이 계실 경우에는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소초면에 있는 '아진철강'이 위에 말씀드린 자재를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터 파기 할 때 전체적인 깊이를 90센티미터로 정했습니다만 서남쪽은 120센티미터를 파고 철근 배근시에도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집의 향은 서향인데 햇볕을 가장 많이 받는 방향은 서남방향이고 이 때문에 봄철에 지반 침하가 가장 많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공사 착공은 2000년 9월말에 시작했습니다.
흔히 늦가을 공사는 망하는 공사라고 하는데 이는 낮의 길이가 짧아지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이 짧고 이로 인해 인건비 지출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의 기본적인 골격을 목재로 정했고 벽도 통나무를 30센티미터로 잘라 흙과 같이 쌓아 올리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착공 시기를 9월말로 정한 것입니다.
이유는 겨울이 되기 직전의 10월 말부터 12월 초까지의 시기에 벤 소나무는 수분 함량이 적고 송진 함유율은 많기 때문에 집을 지은 후 소나무 향도 진할 뿐더러 잘 썩지않기 때문입니다.

 

 

#.3

본채를 짓기 전 가족들이
임시로 거처할 부속동을 먼저 지었다.
현재 창고겸 작업장으로 쓰고 있다.

집을 짓기 전 네 번의 겨울을 보낸 움막(?)을 정리하기 위해 공사의 우선 순위를 설정해야 했습니다.
(주의 : 2편에 저희 가족들이 살던 움막 사진이 있으니 혹 못 보신 분들은 꼭 구경을 하시고 다음 글로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제일 먼저 기초공사가 끝나는 대로 겨울이 되기 전 부속동을 완공하고 움막을 철거한 뒤 급한 이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그 해 겨울은 11월까지도 이른 추위가 찾아오지 않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부속동의 구조는 △내벽은 빨간 벽돌을 쌓고 △방을 두개로 나누어 한 칸은 보일러를 설치, 나머지 한 칸은 구들방을 설치하기로 했고 △지붕은 샌드위치패널(100밀리미터)을 덮어 본채 공사를 할 때 아스팔트슁글로 마감하기로 정했습니다.

이 중 내벽을 빨간 벽돌로 정한 것은 내부 벽면 자체에 도배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공사비를 줄일 계획이었습니다.
벽돌 한 장의 두께로는 외풍에 견딜 수 없음으로 벽돌을 쌓을 때 스테파노의 의견대로 반생(불에 구운 결삭용 철선)을 일정한 길이로 잘라 반으로 접고 이것을 벽돌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끼워 넣은 뒤(조적공사를 할 때 몰탈 사이에 끼워 넣어야 됨) 각목(9㎝)을 세워서 철선으로 고정했습니다.

 

'햇꿈둥지' 공사 총감독
스테파노

외벽 마무리는 죽데기(폭15~20㎝ 가량)의 양쪽 면을 잘라낸 뒤(제재소에 특별히 주문을 해야 했음) 껍질을 모두 벗겨내고 그라인더를 이용, 표면을 곱게 갈아냈습니다.
통나무도 마찬가지지만 겉껍데기를 벗겨내야 썩는 정도도 덜하고 벌레도 덜 먹고 마르는 속도도 빨랐습니다.

이런 준비가 끝난 뒤 벽면 아래부터 횡으로 죽데기를 맞추어 가며 벽돌과의 틈새(각목 두께 9㎝)는 흙, 석회, 소금, 숯가루, 짚(자른 것)을 섞어 다져 가면서 쌓아 올려 마무리했습니다.
지붕은 서까래 위에 두꺼운 합판(고맙게도 안양 동기생들이 직접 실어다 주었습니다.
그 전엔 웬수 같더니만 그 땐 얼마나 고마운지...)을 깔고 그 위에 샌드위치 패널을 덮어 실내 마감을 끝냈습니다.
결국 실내의 반자없이, 바닥에 누우면 천정의 합판과 서까래가 보이는 구조입니다.
창은 낙엽송 원목을 20센티미터 두께로 켜서 통유리창을 설치하고 창틀 면적의 4분의 1가량 부분에는 소나무 판재로 직접 만든 여닫이문을 달았습니다.

다음 구들방은 온돌용 구들을 구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요즈음은 시골 대부분의 집들이 보일러로 교체하는 바람에 구들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지방에선 구들돌을 '정개돌'이라 부릅니다.
다행히 앞마을 이 베드로의 도움으로 집 개조 시에 떼어놓은 돌을 구 할 수 있었고 모자라는 돌들은 화물차를 끌고 몇 몇 마을을 돌아다니며 디딤돌로 놓여진 것 중 쓸만한 것들을 얻어다 채울 수 있었습니다.

구들 배열 방식은 겨울이 길고 추위도 심한 지역이라 마을 어른의 자문을 받아 막구들(일정하게 연도를 만들지 않고 부자리 넘어 부터 방사선 형태로 얼기설기 놓음)로 설치했습니다.

 

눈 내린 겨울 풍경.
부속동을 짓던 겨울 유난히 눈이 많았다.

부속동과 본채의 내벽에 쌓은 빨간 벽돌은 여주읍 연양리에 있는 '제일연와'에서 정품이 아닌 비품의 싼 벽돌을 구해서 쌓았습니다.
열한 파렛트 물량이니 11,000장을 들여 온 것인데 정품과 비교하면 간혹 표면과 귀퉁이에 흠집이 있거나 조금은 비틀어져서 구워진 제품들이나 조적공사 때나 완공 후에도 보기에 크게 흉하지 않아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이미 바닥 기초공사가 끝나 있는 상태였으므로 인건비도 줄일 겸 본채 내벽의 조적공사도 이때 같이 했습니다.

움막을 헐어 낸 뒤 살림살이 대부분을 이 부분에 쌓아 놓은 채 커다란 천막으로 덮어놓았는데 그 해 겨울, 눈 정말로 지치게 내려 수시로 천막에 고이는 물, 눈물 퍼내느라고 눈물 꽤나 흘렸습니다.

눈물을 퍼내며 눈물을 흘리던 2001년 1월 17일에 쓴 '일기예보'란 제목의 졸작 한 조각을 소개해 올립니다.

 


저 혼자
겨울 메이도록 풍성하고

새들은
주린 배로 허공만 쪼아서
푸르디 푸르게 조각난 하늘은

오늘 밤

눈송이로 뿌려지고 있다

 

#.4

 

람보 아줌마가 구해온 낙엽송 서까래
를 올리는 모습

"형님, 형수님 별명이 뭔지 아신대유?"
눈 내리던 어느 날 술상을 마주한 스테파노가 물었습니다.
"우리 마누라 무슨 스타라도 되냐? 별명은 무슨?..."
"람보 아줌마예요, 람보 아줌마."
서까래감, 벽체용 목재를 싼값에 구해 보겠다고 아내는 빨간 수건 이마에 질끈 동여매고(홍건적인가?) 근동의 산판마다 짚차를 몰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남자도 아닌 여자의 극성스러움을 곱게 봐 주신 어느 산판 업자께서 요구한 수량만큼을 싼값에 직접 운반까지 해 주셨습니다.
마누라 아니었으면 정말 햇꿈둥지 만들기 힘들었을 겁니다.

서까래 감은 당초에는 소나무로 할 계획이었으나 사정상 낙엽송으로 결정했습니다.
낙엽송처럼 곧은 나무를 구할 수 없어 부득이 변경했고 처음에는 뒤틀림을 많이 걱정했는데 시공 후 뒤틀림은 적었습니다.
단 갈라짐 현상이 있었으나 한동안 진행되다가 멈췄는데 심하게 보기 싫지는 않습니다.
운반된 나무들은 물기가 닿지 않도록 비닐과 천막으로 꽁꽁 싸 두고 저희도 꽁꽁 눈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람보 아줌마 일하는 모습.
적극적으로 즐겁게 집짓는 일을 한다.

마누라가 람보가 될 정도로 힘든 일은 서까래 구하기뿐만 아니었습니다.
물을 구하는데도 2년이나 걸릴 정도로 무지무지 힘들었습니다.

앞에 게재된 사진에서 이미 확인을 하셨겠지만 처음 이곳은 집이 아닌 움막 형태의 가건물 하나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양으로 있었습니다.
열평 가량의 허술한 움막과 금방 주저앉을 것 같은 모양의 뒷간 그리고 구멍 숭숭한 채 조그맣게 쪼그려 앉은 비닐하우스 한 동(이 비닐하우스가 수도간이었는데...)이 전부였습니다.
식수는 비닐하우스 안에 플라스틱 함지 하나를 묻고 온데를 알 수 없는 옛날 옛적의 13㎜ 구경의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었고 이 끝에서 가는 물줄기와 함께 쉴새없이 기포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여보! 이 물 어디서 나오는거야?"
내 물음에 아내는 "저 산 너머..."라며 아무 걱정없는 대답을 합니다.
집 뒤의 능선을 하나 넘은 가냘픈 파이프는 약 800m 가량을 땅 속으로 지난 뒤에야 만날 수 있는 계곡 옆의 사발만한 샘에서 시작하는 물줄기를 힘겹게 이어주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집의 위치가 샘 보다 낮기는 한데 중간에 약 30m 높이의 능선을 넘어야 하다보니 자연 낙차에 의한 유속으로는 툭하면 물이 나오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거였습니다.

 

치악산 샘물. 식수는 물론
호사스럽게도 화장실용도 이 샘물을 사용한다.

온갖 고생, 온갖 낙담, 온갖 궁리 끝에 약 30m쯤 윗 쪽에 있는 샘을 하나 다시 찾고, 500ℓ 용량의 플라스틱 용기를 설치, 처음 샘에서 시작하는 관경은 40㎜로 50m, 이 후 100m의 길이는 25㎜ 관경으로 줄였으며, 능선을 넘기 직전에서는 15㎜의 관경으로 줄여서 전체적으로 관경 내에서 발생한 압력과 유속이 유지 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집 뒷산 능선 직하 지점에 5,000ℓ용량의 수조를 설치하고 급수 파이프를 현재 지은 집안으로 설비하여 모든 용수는 자연압에 의해 공급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수세식 변기의 용수마져 치악골 샘물이라 좀 호사스런 생각이 없진 않지만 말입니다.
샘에서 수조까지 공급되는 물 중 수조를 채우고 남아서 넘치는 물은 별도의 관로를 설치하여 마당 앞 돌 쌓은 사이로 흐르게 하였습니다.

쉽게 지하 관정을 설치하면 되지 않는까 하는 생각으로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곳은 석회암 지역이라 지하수에 석회질이 많이 섞여 있어 음용수로는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짧게 표현한 이 물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근 2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지금 마당가를 넘쳐 흐르는 물의 소리만 들어도 무작정 행복해지기까지 합니다.

 

#.5

 

햇꿈둥지의 뒷면.
좌측이 부속동이고 우측이 본채

농사 터가 있는 시골의 곡간은 곡식을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라 잘 익은 똥이 가득한 똥뒷간이라고 불초 소생 감히 소리 높여 외치고 싶나이다.

밭가의 2.5평쯤의 터에, 부속동을 지을 때 쓰고 남은 죽데기를 이용 집과 외관상 어우러질듯 싶게 변소간 하나를 지었습니다.
2.5평이면 변소로는 조금 크다 싶은데 이것은 농구며 농사일에 소소히 필요한 잡동사니를 한곳에 두기 위해서 입니다.먹는 것이 다양해지면서 더욱 그렇겠습니다만 사람의 똥은 썩히지 않고 바로 작물에 주면 작물에도 해가 되므로 가을 이후 모아진 것은 묵혔다가 봄에 쓰고, 봄부터 모아진 것은 가을에 밭에 내는 방법으로 쓰고 있습니다.
똥을 준 작물(예를 들어 자두나무에 주었더니 당도가 훨씬 높아진다든지)은 그 맛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병해에도 잘 견뎌냈습니다.

전래적 방법의 농사법에서는 요즘처럼 "똥=더럽고 더러워서 생각조차 말아야 하는 오물"이 아니라 식생활의 근간을 구성하는 토양 생산의 원천적 요소였음이 분명한 듯 합니다.
즉 생산의 태반적 요소로 자리해서 순환의 과정을 거쳐 다시 우리 먹거리를 구성했었음에 비해 요즘의 똥은 애물단지 입니다.

사랑 받지 못한 아이가 삐뚜로 자라서 사회적 문제를 빚어내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이 시대 똥의 문제도 같은 것 아닐지요.

만약 도시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단수의 상황이 빚어졌다 가정 할 때 밥이면 밥 짜장면이면 짜장면 시켜 먹으면 됩니다.
세수? 짜장면 가져 올 때 물수건 가져오라고 하여 헤비적거리면 됩니다.
똥? 그건 대책 없습니다.

 

별도로 만든 똥뒷간.

차 후 똥뒷간을 좀 더 기능적으로 보완해서 밭주변에 지천인 여러 종류의 풀을 베어 유기 비료를 만들 계획입니다.
이 옥외의 똥 뒷간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본채를 지을 때 수세식 화장실을 별도로 설치하였습니다.

물 뒷간(수세식 화장실)은 휴가철을 대비한 부분도 많습니다.

사실 이쪽으로 이사를 온 후 더욱 크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휴가철만 되면 사람들이 동쪽으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차 있고, 신발 있는 사람들은 몽땅 동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휴가철 퇴근길은 앞을 줄줄이 막아서서 동쪽을 향하는 분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곤 합니다.

앞으로 한자로 피서(避暑)는 避西(서쪽을 피한다)로 써야 한다고 저는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화장실 벽면 내부는 방수를 위해

시멘트 벽돌로 했다.

휴가철이면 어김없이 찾아 주시는 친지, 선후배분들 외에도 '너희 집은 곧 내 별장'이라는 스스로의 개념 정립에 단 한순간의 주저함도 미안함도 없이 찾아오는 몇몇 뻔뻔 악성종양(?) 같은 분들로 이 집구석이 미어지고 넘칠 때 인고의 표정으로 똥깐 앞에 줄을 서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속동과 본채가 이어지는 공간의 한쪽 켠에 하나를 마련하고, 본채 안 아이들 방과 방 사이에는 욕조가 설비된 화장실을 설치해서 기능의 분리성과 이용의 효율성에도 주의하였습니다.

본채 바닥면의 보일러 배관이나 급배수관도 스테파노와 둘이 직접 시공하였고 두군데 화장실의 타일은 워낙 만만치 않아 전문 타일공에 의뢰 하였지요.

다만 화장실 부분은 타일 시공 전 방수 공사를 해야 했는데 시공 면적이고 뭐고 따질 것 없이 무조건 화장실 한군데 당 30만원을 내라는 억지스러움에 화도 나고 해서 방수액을 파는 아저씨께 꼬치꼬치 시공 방법을 물어 봤더니 ▲모래를 섞지 않은 시멘트 가루를 손으로 저어질 정도로 묽게 방수액과 희석하고 ▲주방에서 사용하는 고무 장갑을 낀 후 벽면(150~170㎝가량)과 바닥면 조적의 틈새 등을 꼼꼼히 메우고 표면에 도포하는 방법을 3회 정도 반복할 것을 알려 줬습니다.

실제로 해 보니까 한번 칠 한 후 약10분 후면 다시 시공 할 수 있을 만틈 굳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좁은 공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노릇을 하다 보니 갑자기 호흡이 무겁고, 어지럽고 이러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아뿔사! 유독 가스 중독 증세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빠져 나와 통풍 잘 되는 곳에 누워 생각해 보니, 방수액과 시멘트에서 나온 암모니아 가스(독성가스로 대형 냉동 시설의 냉매로 쓰이기도 함)에 잠깐 중독이 되었던 것입니다.

방수액 가게 아저씨가 시공법을 알려 주시면서 시공 공간 출입구에 선풍기 등을 설치하여 강제 환기를 시켜야 함은 물론 수시로 작업 공간을 벗어나 쉬어야 하는 주의 사항을 알려 주시지 않았던 겁니다.

혹시 이 내용을 보신 분 중에 같은 내용으로 직접 공사를 하시게 될 경우 특히 유의 하셔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좌측 본채 벽면 공사중

이곳 원주 주변에서 이상의 자재를 구입하실 경우라면 제 경험으로(이곳 저곳 원주 주변의 대부분을 둘러보았음) 원주여중, 즉 환경청 사거리에 있는 '한일타일'이 욕조, 변기, 세면기는 가장 싼 가격으로 구입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타일은 원주에서 문막으로 나가다 대명원 앞에 있는 '북원타일'에서 구입했는데 물건 계약 당시의 정해진 물건이 아닌 엉뚱한 물건을 보내 놓고 책임감 없는 소리를 하는 등 말썽이 있어 타일 시공의 시간도 길어지고 아주 고생스럽게 하여 집 짓는 동안 가장 나쁜 인상을 주었던 곳입니다.

화장실은 물을 많이 쓰니까 특히 방수에 유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외벽 전체를 시멘트 벽돌을 조적으로 쌓아 올렸고 창문도 별도로 샷시로 제작하여 설치 했습니다.

건물 전체의 외벽은 흙과 나무인데 그럼 이 부분은 시멘트 벽돌인가?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흙벽의 두께는 전체적으로 30㎝인데 화장실 부분의 벽돌 한 장은 약 10㎝ 가량이니까 외벽 20㎝는 다른 벽과 마찬가지로 흙과 나무로 마감을 하였지요.

오늘 글 정리하며 '농사연습'이란 짧은 글 하나 드립니다.

 

초등학생 조카 녀석의
듬성한
방학숙제 일기처럼

오늘은
샛노란 참외를 따고

또 오늘은
태양 빛 붉디 붉은
토마토 한아름을 거두었지만

어쩔 수 없이
게으르고 게을렀던 날들은
제멋대로 지천인
잡초로


 

#.6

 

햇꿈둥지의 상량식

지붕은 박공 지붕입니다.
대학 시절 '박공'이라는 단어의 뜻을 제멋대로 '박쥐가 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정해놓고는 "얼마나 진짜 같으냐"고 자랑자랑 했었는데...

공간 내의 전기 설비며 환기의 필요성이며 특히 어릴 적 기억의 다락방 향수며 등을 욕심부려 다용도실 천장에 오르막 출입구를 설치해 기어이 다락방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도를 닦으리라. 그리하여 이 나라 고스톱계를 평정하리라..."
딱 네 명이 앉을 공간이므로 아내에게 한 소리인데 아내 얘기로는 "고스톱계 중 광 파는 분야에서 도를 닦으라"고 말하더군요.

 

내벽 공사

집의 높이를 바람, 채광을 고려해서 2m20㎝로 낮게 했으며 지붕면도 햇볕을 많이 받는 서쪽으로 6m 동쪽으로는 4m를 계획했습니다.

농담처럼 스테파노와 나눈 얘기를 그저 훌쩍 적용하고 말았는데 얘기의 요지는 서쪽 지붕면을 6m로 함으로써 물매를 줄이고 그 면에 가을철 고추를 말려 진짜 태양초를 만들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추녀의 길이는 사방을 모두 50㎝를 늘일 계획이었는데 공장에 패널을 주문할 때 치수를 불러 주면서 10㎝를 줄여, 공장에서 자를 때 또 10㎝를 줄여, 이렇게 잘못 알려주고 잘못 잘라서 완공 후 추녀의 길이는 30㎝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자고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하긴 했는데 짧아서 불편합니다.
하는 수 없이 추녀 끝 30㎝ 가량을 달아내야겠는데 집 전체의 외관을 해치지 않을 소재 선택이 어려웠습니다.

패널을 이어내는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올려 드리겠습니다.

 

지붕 서까리공사와 합판공사

그다음 지붕 표면은 아스팔트 슁글(육각 그림자)을 80평 면적 물량으로 시공했습니다.
이 경우 몇몇 시공업자께서는 작업 진행을 이유로 못을 한 개만 박거나(원래 두개를 박게 되어 있지만) 슁글 뒷면에 붙어 있는 비닐을 벗기지 않고 그냥 시공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문제로 시공 업자마다 다소 의견 차이가 있었고 시공업자마다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 의견들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 비닐을 붙인 채로 시공을 해도 일정 시간 경과 후에는 슁글 뒷면의 핏치와 녹아 결합되므로 관계없다는 것입니다.2. 슁글 뒷면의 비닐은 핏치와 결합되지 않고 굳어지므로 시공 후 시간이 경과 할 수록 패널의 표면에서 분리되게 된다.

 

내부천장 돌출 서까래 모습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인데 제가 택한 시공 방법도 그러려니와 사후관리의 문제로도 2번의 내용처럼 슁글 뒷 면의 비닐막은 벗겨내야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비닐이 막으로 붙어 있어 잘 떨어지지 않고 결을 형성하며 찢어지기 때문에 벗겨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폐단이 있으나 뾰족한 못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면 제대로 벗겨 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슁글 시공 전에 패널의 이음새와 못 박음 부분 등 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는 부분은 방수시트로 일일이 막아 버렸습니다.

패널과 슁글 작업을 하는 동안 손바닥 곳곳에 물집이 잡혀 쓰리고 아팠었는데 그때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도구일 뿐이로구나!'
비싼 화장품, 비싼 호피 코트로 가꾸고 치장해야 하는 것이 아닌 하늘이 주는 일용할 양식을 땀 흘려 애쓴 후에 받아 이 생명을 꾸려가야 하는 도구임을...

 

#.7

 

작업장으로 쓰는 부속동 내부에서 손수 문짝
을 짜다 잠깐 휴식 중.

집을 직접 지어보신 분들 대부분이 그러하겠습니다 허허 벌판에 기둥 서고 지붕 씌우고 나면 집이 다 된 것처럼 대견스럽기 그지없지요.
저희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바람벽의 나무, 흙일을 시작하고는 얼마나 힘에 겨웁던지...
"이 집 다 되거든 다시는 개집도 하나 짓지 말자"며 아내와 다짐을 했습니다.

더구나 저는 사무실 출근해 있는 사이, 집 짓는 일과 일 하시는 분들의 식사(아침, 점심, 간식 등)를 준비하는 일 등에 지치고 지친 아내가 급기야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는 사태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담당 의사 선생님과 면담을 마치고 돌아 온 내게 아내는 지치고 지친 걱정스런 모습으로 "의사 선생님께서 뭐라시냐?"고 물었습니다.
"응 새 걸로 바꾸면 돈 많이 드니까 그냥 고쳐서 쓰래..."

바람벽의 기본 소재가 되는 흙은 집 뒤의 밭에서 구 할 수 있었고, 혼합 재료인 모래와 석회, 소금, 통나무를 준비하였습니다.
통나무는 지난 겨울 마을 근처의 산판에서 사 들인 잣나무를 겨울 전 겉껍질을 벗겨 비닐과 천막으로 꽁꽁 싸두어 잘 말라 있었으며 이것을 벽의 두께인 30센티미터 길이로 모두 잘랐습니다.

 

상량 때 손수 글씨를 써 넣은 대들보.

벽체 시공용 흙을 배합하고 이기는 일은 통상 커다란 통에 물을 부어가며 발로 밟아가며 하는데 일의 진도도 더딜뿐만 아니라 흙이 제대로 이겨지지 않을 것 같아 스테파노와 상의하여 바닥 기초공사 때 썼던 2입방 용량의 콘크리트 희석 기구에 진흙을 넣어 포크레인으로 1차 배합을 한 후, 인부들이 발로 밟아 2차로 진흙 이기기 작업을 하는 방법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밀가루 반죽을 할 때도 손으로 많이 이겨주어야 점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흙도 많이 이겨주어야 흙의 입자내 기포가 적어지며 점도가 높아집니다.
석회,흙, 모래(모래 대신 석비레-풍화된 편마암-를 넣기도 합니다) 등 혼합재의 혼합비를 제대로 기록해 놓지 못해(아내 간호하랴 일 돌보랴 너무 정신이 없었음) 알려 드릴 수 없음이 죄송합니다.

 

벽면의 모습과 초립을 이용해 만든 등갓.

다행스러운 것은 스테파노가 각 벽면의 재료를 혼합할 때 조금씩 배합률을 달리한 것인데 이때 모래와 석회가 조금 많은 듯 싶어 손으로 한참을 이겨도 푸슬푸슬 할 정도로 점도가 약한 흙으로 쌓은 벽면이 균열도 가장 적고, 건조도 빨랐으며 건조 후 수축률도 가장 적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벽을 시공하실 때 가장 주의하실 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벽면의 전체 높이를 가늠하여 2회 또는 3회로 나누어 쌓아 올릴 것(한번에 몽땅 쌓아 올리면 흙과 나무의 자체 하중이 작용하여 벽면이 상, 하로 변형되거나 심한 경우 무너져서 재시공을 하게 됨)2. 흙 사이에 넣을 통나무는 껍질을 벗겨내고 충분히 말려서 넣을 것(껍질을 벗겨내지 않으면 나무의 썪음이 빨리 진행되고 덜 마른 나무를 넣을 경우에는 흙과 나무의 마름이 진행 되면서 통나무 주위로 원형의 틈새가 생김)3. 흙의 시공과 건조는 '하지'전에 끝날 수 있도록 공기를 끝낼 것('하지'전에 공사를 마쳐야 실내의 습기가 덜 하다는 흙집 짓기 공부의 결과 임)

 

통나무와 황토로 만든 벽면 모습.

벽면 시공시 전체 벽면 하단의 40㎝는 시멘트 몰탈과 자연석을 쌓은 옹벽으로 돌렸습니다.이것은 벽체 하단이 비에 젖어 부서지거나 특히 쥐의 극성으로 구멍을 내는 일을 막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시골 살림하시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겠습니다만 여름철에는 들에 먹을거리가 있어 집안에 쥐들이 덜 들어오는데 겨울철이면 난리입니다.
대비를 충분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기 공사를 싸게싸게 하다 보니 선 끝에 소켓 하나 없이 덩그러니 전선만 나와 있네요.
그래서 호기롭게 조명기구 가게를 들려 보니 세상에나...너무 비싸고,너무 호화롭고...
삼파장 램프 2마트에서 사고, 원주장, 횡성장, 여주장을 돌고 돌아 이천원 삼천원 쯤의 나무 뿌리로 만든 바구니 구해서 거꾸로 매달았더니 훌륭한 갓이 되었어요.
거실 벽면은 보일러실 벽과 잇대어 있으니 시멘트 미장 부분이 곱지 않다고 서까래 쓰고 남은 목재를 종으로 세워 한 쪽 벽면을 마무리했고, 산새들 새끼치기가 끝난 빈 둥지 몇 개 구해서 중간중간 매달아도 놓았습니다.

또 빨간 벽돌 쌓은 벽에는 필요한 위치에, 필요한 만큼의 벽감(壁龕)을 만들어 꽃병이나 예쁜 소품들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하고 상단에는 스포트 조명등을 설치했습니다.
거실 한 켠에 벽난로 공간을 비워는 놓았는데 아직 미완의 상태입니다.
감악산 자락에 고운 흙집 지은 분이 계시다기에 허위허위 찾아 보었더니 참으로 기막힌 벽난로가 있어 소개하니 혹시 이 방법 좋다 싶으시면 꼭 한번 해 보시기바랍니다.

이 분께서도 거실 한 켠에 벽난로 설치했는데 그냥 굴뚝으로 연결한 것이 아니고 벽난로와 연결되는 작은 방 하나 만들고 벽난로의 열을 이용 구들을 설치하신 것입니다.

참고로 산 깊은 자락에는 여름철 기약없는 낙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기기 쉽습니다.
적정한 피뢰 설비를 해 놓으면 좋겠으나 이게 또 쉽지 않은 일.
특히 보일러실은 전기 인입선 직전에 별도의 누전차단기를 설치하시는 것이 방편의 하나일듯 싶습니다

 

집 지을 당시 [시골로가는 마지막 기차]에 연재했던 내용들이

이곳 저곳 인터넽 창해를 떠 돌아 다니기에 멱살 잡아 제자리에 앉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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