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이제 겨울

햇꿈둥지 2005. 5. 12. 14:54

 

 

 

한 밤중
아이들 도깨비 놀이처럼 집안의 불을 몽땅 끈 채로 오두마니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상황을 만들 때가 있다

안온하다

가로등 휘황하고
온통 흐느적 거리는 저잣거리는 번뜩이는 네온들 마다 야릇한 향내를 풍기고 있을 터이다

지금 내 곁에는 어머니 몸속에서 양수의 압박으로 전해 오는 어둠 뿐이다
차츰 내 스스로 하고 있는 호흡조차 번거로워진다
의식의 무중력 상태

하루종일 먹잇감을 해결하기 위해 저잣거리를 헤메이던 나는
이 어둠 속에서 충분한 위안을 얻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이것이
내가 이 산 속에 살 수 있는 이유의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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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녀 끝 바람이 한결 헝클어진 모습이다
풍경의 울림이 정숙치 못 하므로...
아궁이 가득 불을 넣었다
주홍빛으로 이글 거리는 불꽃을 볼 때 마다

저 놈...
저 생명 있음을 알리기 위해 이글 거리고 너울 거리는 저 놈
몽롱한 시선으로 한참의 시간을 주시 하다 보면 저 너울 거리는 불꽃 속에 온 몸으로 뛰어드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는 자기 최면에 걸리고 만다
이 쯤의 시간,
굴뚝 넘어로는 산발한 젖빛 연기가 허공에 뿌려지고 있다

참 산 속 풍경 치고는 그만이다
다만
불때는 내가
지금 이 모습이 아닌
허리도 조금은 굽고
얼굴 가득 치악의 골 같은 주름이 패여 흰머리 헝클어져 있으면 그만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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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의 빈 시간 동안
소토골의 오두막엔 왼갖 가을 색감들이 뿌려져 있어서
그만 입이 딱 벌어지는 감탄사 외 에는 아무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었다
발걸음 급하게 석양빛을 연모했던
옻나무며
붉나무들은 이제 제 가을 빛을 다 하고 이 여린 바람 결에도


속절없이 잎을 떨구어 내고 있다

여름내 무성 했던 제 온 몸의 잎을 떨구어 겨우 발등만 덮은채로
겨울 준비 끝 이라는데
나는 이제부터 속옷에 겉옷을 덕지로 끼어 입어야 한다
이 반행동의 문제 앞에서
나는 어떤 이론으로 자연스러워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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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밭은
그나마 알량한 기대로 천막과 부직포로 덮어 놓았던 희망의 부분마져
집 비운 몇일 동안 연일 계속된 멧돼지들의 융단 폭격(?)으로 깡그리 일구어진 상태로 황량하다
염려가 증폭되어 다소 격앙된 새마을 지도자는
"그노무 돼지덜 깡그리 잡아 버리자..."이지만
그래 개떡 같은 농사거니 너희들이나 되니 이리 나눌 수 있었지...하는 마음 뿐...
다행히 얼마되지 않은 수숫모들은 제법 튼실한 알들을 매달고 하늘 깊이 늠름하다
어쩐지
봄볕 맑은 물 속에서 들여다 보던 개구리 알들이 연상된다
저 파란 하늘 깊이
동글 동글 잘 익은 수수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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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부엌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넉넉하게 장작을 준비했다
화석 연료로 뎁혀지는 따듯함 보다는 훨씬 맛깔스러운 따듯함,
그 온돌에 누우면 긴 밤이 행복하다

유난히 둘쨋 딸을 사랑 하셨던 장인
그 분을 찬 땅에 흙 덮어 드리며 생각 했었다

당신 사랑 만큼은 어림도 없겠지만
그래도 흉내로나마 그 사랑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한 저 입니다...
이제 제 몫 입니다...

그 사람
지금
내 옆에서 혼곤한 밤

밤 새
서로가 그늘이 되는 꿈을 꾸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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