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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거리
그렇게 큰데도 불구하고 막히고 밀리는 길을 오랜 시간 더듬어 도시를 다녀 왔다
건물들은 까마득히 높고 불빛 화려한 거리
더 많은 것을 모아서
더 기름진 음식을 먹고
더 멋진 옷을 입어
더 화려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모두들 발걸음에 날이 선 거리
more, more, more...가 주기도문 처럼 뿌려진 거리
"이 도시에는 딱 세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요
부자인 사람 이거나
부자인 척 하는 사람 이거나
부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이거나..."
딸 아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으므로...
그 어느 것에도 해당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토록 예리하게 날 세운 시대의 기준으로는 무능이 될 것 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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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하라
이것도 소비하고
저것도 소비하고
혹시 주머니가 비었다면
은행장 명의로 프라스틱 현금을 빌려 줄테니 신용불량자가 될 때 까지, 개인 파산을 할 때 까지 마음 놓고 써 봐라
가급적이면 티븨를 오랫 동안 보도록 하라
그러면
어떻게 부자처럼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것이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정치마져 자본의 하수인으로 만들어 사회 정의를 무산 시키는 일이다
손님에 의해 문이 열리기 보다는
빚쟁이에 의해 문이 열리는 횟수가 더 많은 초라한 가게 벽에 걸린
"네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 하리라..."는 주술 같은 목판 하나,
회색 이거나 갈색 일변도의 삶 뿐인 이 도시에
밤마다 화려한 불빛이 빛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약없는 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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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내 무능을 적당히 포장 한채로 살아 갈 수 있는 산 속으로 돌아 왔다
무능 하고도
양복에 넥타이 정도의 포장만으로 적당히 안 무능한 부류로 분류되는 사회 오류에 감읍 할 필요 없이
떨어진 작업복 한벌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뒹굴어도
바람처럼 편안하다
이제 막 새순을 돋우는
냉이와
돋나물과
주변의 왼갖 나무들과 손 잡고
자유롭다
누구를 유혹 하거나
누구의 유혹이 전제된
아편 같은 술잔이 아닌
이 빠진 내 술잔을 채워
독작의 취기가 낭낭 하고도
이 밤
서글프거나 외롭지 않으면
또
그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