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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덕분에
메말랐던 들판이 비로소 촉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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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마다 가득한
물기 아닌 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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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은 한뼘쯤 자라고
풀들은 한발씩 일어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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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왔다
- 일요일인데 뭐해요?
일요일이 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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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워터파크라는 놀이시설에서의 기억,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짬뽕으로 물에 젖어 신바람나는 자리 한 구석에
손주인듯한 어린아이를 신주단지 처럼 끌어 안은채
뻘쭘 어색한 분위기로 겉돌기를 하시던 노부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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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 날이 하도 더워 물놀이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내게도
올 것이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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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청소 중에 깊은 구석에 박혀 있던 통조림 하나를 찾았다
그 상표에 새겨져 있는 유통기한이란 숫자
문득
내 몸 어딘가에도 유통기한이 새겨져 있을거라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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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토록 비 오심으로
종일토록 빈둥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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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 밭에 올라
풋고추 다섯개
오이 세개
가지 두개와 쌈채 몇잎으로 초록 넘실대는 밥상,
산속 공짜 마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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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의 오랜 궁리와 땀으로
양 한마리 생명을 얻었고
사람의 인연에 묶여 산중 가족이 되어
먼 산 그윽히 바라보며 그저 묵언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