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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열무라고 뿌린 씨앗은 여름 무였다
열무라고
열무라고
열 번도 넘게 고집을 부리다가
열무보다 훨씬 곧고 억세게 뻗는 줄기를 본 다음에야
슬그머니 고집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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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둔 고집의 대가는
한 바구니가 넘는 무를 다듬는 노고로 면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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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두어진 것들이
얼렁뚱땅 얼버무린 김치가 되었는데
열무처럼 나긋하지는 않지만
농익은 여름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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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김치 어금어금 씹으며
속으로만 되뇌이기를
그래도 열무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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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토록 비 오시니
모처럼
아랫집 영감님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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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한 귀는 여전히 시원찮아서
이렇게 저렇게 병원 출입만 뻔찔하게 되었는데
문득 전화,
더러의 친구들이 병원에 있거나
몇몇은 장차 아프기로 예약되어 있다는 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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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제
늙음조차 지나 낡음의 경지에 이르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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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락 도자 장승 속에서 자라던
곤줄박이 여섯 아이는 창공을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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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더워서
딸과 며느리에게
팥빙수 한 그릇씩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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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몇 번 까딱했더니
카톡 하고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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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방충 문을 만들던 한나절의 노고는
몽땅 땀띠로 솟아서
할 수 없이 피부과
처방 외의 권고 사항 중에
자주 찬물로 씻어줄 것, 이 있음으로
자주 씻기 쉽도록 반 벌거숭이 놀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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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새들 소리만 분분한 산 중에
더운 한 철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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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가 지났다
다시 겨울을 향해 가는 날들
여름이거나 겨울로 반복되는 노정 속에
경유 계절로 작아져 버린 봄과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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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그저 훌훌 뿌려대던 유박 비료의 독성이
청산가리 이상의 독성이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알았다
날나리 농사의 방법을 고치기는 하겠으나
그간의 무지를 어이 거둘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