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풍경소리

척독(尺牘)

햇꿈둥지 2020. 7. 18. 07:45

 

 

#.

의약품으로 위장한 방사선이

스멀스멀 몸 안에 번진 뒤

이 몸 구석구석을 톺아 보게 하는 일

 

#.

피폭이다.

 

#.

몇 번째인지 헤아리기에도 지쳤으니

그저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두 시간 가량을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

사는 일이

살아 있는 일이

아득한 꿈길 같다

 

#.

근엄의 원조처럼 보이는 의사는

더욱 강화된 근엄의 분위기와 목소리로

이상 없음으로 6개월 뒤... 검진 날짜를 확정 했으므로

 

#.

내 목숨은

의학쩍으로 6개월 연장되었다

 

#.

모든 사람들이 재갈을 지은채

유령처럼 침통한 도시의 한구석

그까짖거 다아 잊어버리자고

헌책 몇 권을 품에 안고 돌아선 길,

 

#.

묵언 수행 중인 손전화를 깨워

지금쯤

벌통에 코 박고 있을 친구에게 척독 한 줄을 보낸다

 

#.

살아 있다네

 

#.

한 일 년쯤 뒤에나 답장이 올 것이다

열 번 전화하면

열한 번 안 받는 친구니까

 

#.

의사의 처방은 여섯 달뿐이지만

무심한 친구의 답장을 받기 위해서는 일 년쯤을 살아 있어야 하니

명의보다

무심한 친구가 나은 걸까?

 

#.

자도 자도 자꾸 졸려서

독성 물질에 취한 것 같은 도시의 하룻밤

탈출하듯 돌아서서 산골짜기에 들어서니

초록은 맘 놓고 울울하고

새벽 물소리 같은 새소리들

 

#.

헤아릴 수 없는 총생들 속에서

더불어 평화로우니

그까짓 사람의 세월

6개월이 됐든

6년이 됐든,

 

#.

단풍나무 아래

초록빛 바람 줄기들이

서리서리 청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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