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소토골 일기

진정한 손맛

햇꿈둥지 2018. 9. 1. 20:10






#.

연이은 비로

집안 곳곳에 고추 널어 놓는 일로 다소 지친 우리는

고추건조기를 가동 하기로 했다.


#.

작년에 문 닫아 놓고 일년만,

건조기 문을 열자

일년만의 반가움 이라고

신발도 신지 않은 벌들이 떼로 몰려 나왔다.


#.

기절초풍과 혼비백산의 극점


#.

팔과 목 그리고 손등까지

대번

꽃송이 같은 반점이 아프게 붉다.


#.

건조기 안에 농구공 만한 집을 지어 놓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말벌도 놀랐겠지만

곱의 곱으로 놀란채

소금맞은 미꾸라지 처럼 들뛰기를 해야 하는 내 꼴은 또 뭔가

그것도 내 집에서...


#.

철없는 도시 친구들은

시골살이를 택한 우리를 '낭만적'이라고 추켜주기도 하지만

낭만은 개뿔,

이 지경을 겪을 때 마다 난망이거나 낙망 뿐, 


#.

비 개인 뒤

치렁한 햇볕을 얻어 고추를 말린다.

붉은 빛에서

다시 투명한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고추,

음식이 되기까지

고추 하나 하나에 잔잔한 정성이 배일 것이다


#.

그러므로 진정한 손맛은

조리과정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지독히도 더웠던 여름이 침몰해 버린 날 부터

무성했던 초록은 문득 시름 없으니

벌레 먹어 비워진 자리마다 빼곡히 가을이 들어 설 것,


#.

해넘이 무렵부터

가난한 창 밑이 소슬하고

아침이면 시린 이슬이 내리는 날들


#.

눈부신 허공에 기대어

이제 또 누구를 그리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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