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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비로
집안 곳곳에 고추 널어 놓는 일로 다소 지친 우리는
고추건조기를 가동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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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문 닫아 놓고 일년만,
건조기 문을 열자
일년만의 반가움 이라고
신발도 신지 않은 벌들이 떼로 몰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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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초풍과 혼비백산의 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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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목 그리고 손등까지
대번
꽃송이 같은 반점이 아프게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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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 안에 농구공 만한 집을 지어 놓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말벌도 놀랐겠지만
곱의 곱으로 놀란채
소금맞은 미꾸라지 처럼 들뛰기를 해야 하는 내 꼴은 또 뭔가
그것도 내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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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도시 친구들은
시골살이를 택한 우리를 '낭만적'이라고 추켜주기도 하지만
낭만은 개뿔,
이 지경을 겪을 때 마다 난망이거나 낙망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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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개인 뒤
치렁한 햇볕을 얻어 고추를 말린다.
붉은 빛에서
다시 투명한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고추,
음식이 되기까지
고추 하나 하나에 잔잔한 정성이 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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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진정한 손맛은
조리과정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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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도 더웠던 여름이 침몰해 버린 날 부터
무성했던 초록은 문득 시름 없으니
벌레 먹어 비워진 자리마다 빼곡히 가을이 들어 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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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넘이 무렵부터
가난한 창 밑이 소슬하고
아침이면 시린 이슬이 내리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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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허공에 기대어
이제 또 누구를 그리워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