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봉투에는
파종 적기며
발아 조건이며
시비와 구제의 방법들이 참 친절 하게도 적혀 있었다
돈 주고 샀으니...
그렇게 밭고랑 미어지도록
고추를 심고
감자를 심고
엇가리 배추를 심고 상추를 심었지
교과서의 가르침을 익힌 뒤에 관찰 일기를 작성하는 아이처럼
아침마다 안개를 들춰 가며 그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었지
그저 더듬이를 상실한 곤충처럼
봉투 밖의 작은 활자로 만들어진 길을 맴 돌고 있었지
아랫 집 전씨 어르신을 만난 자리
강낭콩 한주먹을 쥐어 주시길래
이 콩 파종 적기가 몇일쯤 이냐고 여쭈었더니
"그저 뻐꾸기 울 때 싱구면 된다"는 말씀
교과서 없는 노인의 일 에는
몇월 몇일의 날짜 대신
뻐꾸기가 울거나 소쩍새가 울거나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갈라져 들리거나
박새가 새끼를 몰고 창공으로 날아 가거나
찔레꽃이 피거나
멧꿩이 둥지를 틀거나 논 가득하던 개구리 울음 소리가 그치거나...의
모든 자연의 소리들이 아량 같은 오차 안에서
시간이 아닌 때를 알려 주고 있었지
씨 뿌림과
그것들 거둠의 때를...
그리하여
이승의 들판에서 곤비하던 몸뚱이 거둘 때 까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