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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헝클어진 비탈의 터전에
모옥 한채를 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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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0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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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여전히 잠시였건만
사람은 늙기에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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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깊어지는
시월의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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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廢寺址)
흥법(興法)과 거돈(居頓)과 법천(法天)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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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중 이라고는 하되
상이 조각된 여러 돌조각들이 다만 인위의 펜스 안에 가두어져 있을 뿐,
발굴 이 후의 복원까지를 사람의 세월로 기다리는 일은 그야말로 요원하니
잠시 돌조각에 새겨진 천년전의 시간을 무릎 맞대고 손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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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문양과
안상(眼象) 안에 새겨진 당초(唐草) 문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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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금이 가는 받침돌에 홈을 파고 나비장을 만들어 묶어두었던 모습,
이런 애씀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소요는 가장 큰 재앙이 되어서
임란을 겪는 동안 왜군의 한양 진출로선 상에 있던 거돈, 법천, 흥법사를 포함한 여주의 고달사까지
결사 항전을 했던 승군들이 궤멸 됨으로써 중도 절도 초토가 되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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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새겨진 글씨의 획들이 어찌 저토록 유려 할 수 있을까?
뒤늦게 글씨를 쓰겠노라고
붓 늘리기와 종이 버리기만 일삼는 한량의 가슴에 아픈 뉘우침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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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어서 황량한 법천의 폐사지에 노을이 깔리는 시간,
가슴에 구멍뿐인 천년수 아래에서 세월과 사람은 문득 눈물겹다
누구든
사는 일로 가슴에 바람이 일거든
그저
바람처럼 둘러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