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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 보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더 많았던,
그런데도
시원하기 보다는 등줄기에 때 앉을 새 없이 땀 줄기 흐르는 날이 더 많았던,
손님이 없는 날 보다는 있는 날이 더 많았던,
그리하여
집 뒤의 너른 밭에는 곡식이 익기 보다는 잡초가 우거지는 날들이 더 많을 수 밖에 없었고
당연한 결과로
뽀송 뽀송 맨 정신으로 하늘을 우러르기 보다는
얼큰 덜큰 취한 몸으로 담베락에 기대어 오줌을 깔기는 날이 더 많았었는데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큰 놈은 군인이 되어 떠나 버렸고
작은 놈은 가방 하나 달랑 멘채 저 먼 유럽으로 대책도 없이 날라 버려서
이 나라 대한민국은
서해바다 새우도 깡이 있고
강원도 감자도 깡이 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로 활용하게 되었으며
이 틈에
쌍둥이들 마져 제 집으로 날라 버려서
휑한 집안에 눈만 껌벅이며 바람벽을 훑어 보다 보니
제기럴
팔월의 서른 하루는 이제 묵은 삭정이 처럼 말라 비틀어져 버림으로써
문득
기슴 한켠이 시려 드는 구월 이라는구나...
이노무 산골살이 참 이상도 하지
겨울의 꼬리와 여름의 머리가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정도의 봄이 오고
여름의 꼬리와 겨울의 머리로 느껴지는 아리까리한 가을이 성질 급한 손님처럼
다녀 가고 나면 이내 긴 긴 겨울...
어제 저녘에는
내년 봄까지 걸치게 될 긴 옷을 꺼내 입은채
추녀 끝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가을 예고문을 받아 들었다
이번 가을에는
시도 때도 없이 외로움 주의 경보가 발령 될 것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