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풍경소리

길, 그리고 기억

햇꿈둥지 2017. 9. 23. 18:09





#.

지붕 낮은 집들이

흐린 남포 불을 밝히기 전 부터

산 그늘에선 승냥이가 울었다.


#.

하늘과 산이 맞닿은 산골

해 떨어지는 시간이 곧 어둠이 되었다.


#.

한 겨울 체육 시간은

우루루 뒷산에 올라 토끼 몰이를 하는

건강한 놀이로 추울새 없이 즐거웠다.


#.

산과

가난한 사람들과

하루에 몇번쯤 먼지를 일구는 신작로와

다시

반복되는 어둠,


#.

이 잠시의 기억은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내게 물려 주신 유언 같은 기억들이다.


#.

늘 아버지를 따라 다녀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은

세번쯤의 전학으로 종결 되었고

그 후 다시는 세상에서 아버지를 뵐 수 없게 되었으므로


#.

사십 대 청상의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은

낯설고 추운 땅에 홀로서기를 시작해야했다.


#.

남은 가족들 모두의 실향,

산다는 건

바람의 위를 걷는 일이었다


#.

여전히

전기도

약국도 하나 없이

하루에 몇번쯤 먼지를 피워 올릴 뿐인

진공의 신작로,


#.

까까머리 아이들이

우루루 산토끼를 쫓아

깔깔깔 소란스럽던 산의 허리가 잘리고

곧게 펴진 고속도로가 생긴 날 부터

바람 소리 뿐이던 산골 마을엔

윤기나는 차들이 바람처럼 굴러 다니게 되었다


#.

내 나이 이전의 아버지가 계셨던 곳,

고무신 추운 발로  놀란 토끼를 쫓으며

하늘 파랗게 깔깔거리던

그러나 이제 나처럼 늙어 버린 철없는 동무들이

마을 듬성하게 섞여 살고 있는 이곳을 지날때 마다


#.

자꾸 촉촉해지는 눈가를 아내 모르게 닦기도 하는 사이

마을도

집들도

아주 오래된 흑백의 기억들 조차도

덧없는 바람으로 스쳐 버리고 마는


#.

오늘도

돌아가신 아버지 보다 더 많은 나이로 늙어가는

철없는 아들 홀로 병원을 다녀 오는 길

서산 노을 따라

자꾸 눈시울이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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