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붕 낮은 집들이
흐린 남포 불을 밝히기 전 부터
산 그늘에선 승냥이가 울었다.
#.
하늘과 산이 맞닿은 산골
해 떨어지는 시간이 곧 어둠이 되었다.
#.
한 겨울 체육 시간은
우루루 뒷산에 올라 토끼 몰이를 하는
건강한 놀이로 추울새 없이 즐거웠다.
#.
산과
가난한 사람들과
하루에 몇번쯤 먼지를 일구는 신작로와
다시
반복되는 어둠,
#.
이 잠시의 기억은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내게 물려 주신 유언 같은 기억들이다.
#.
늘 아버지를 따라 다녀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은
세번쯤의 전학으로 종결 되었고
그 후 다시는 세상에서 아버지를 뵐 수 없게 되었으므로
#.
사십 대 청상의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은
낯설고 추운 땅에 홀로서기를 시작해야했다.
#.
남은 가족들 모두의 실향,
산다는 건
바람의 위를 걷는 일이었다
#.
여전히
전기도
약국도 하나 없이
하루에 몇번쯤 먼지를 피워 올릴 뿐인
진공의 신작로,
#.
까까머리 아이들이
우루루 산토끼를 쫓아
깔깔깔 소란스럽던 산의 허리가 잘리고
곧게 펴진 고속도로가 생긴 날 부터
바람 소리 뿐이던 산골 마을엔
윤기나는 차들이 바람처럼 굴러 다니게 되었다
#.
내 나이 이전의 아버지가 계셨던 곳,
고무신 추운 발로 놀란 토끼를 쫓으며
하늘 파랗게 깔깔거리던
그러나 이제 나처럼 늙어 버린 철없는 동무들이
마을 듬성하게 섞여 살고 있는 이곳을 지날때 마다
#.
자꾸 촉촉해지는 눈가를 아내 모르게 닦기도 하는 사이
마을도
집들도
아주 오래된 흑백의 기억들 조차도
덧없는 바람으로 스쳐 버리고 마는
#.
오늘도
돌아가신 아버지 보다 더 많은 나이로 늙어가는
철없는 아들 홀로 병원을 다녀 오는 길
서산 노을 따라
자꾸 눈시울이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