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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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아래 앵두들이 작은 전구처럼 붉게 밝아지고 있다
그 선연한 붉은 빛 속에서
퇴락한 기억들 조차 붉게 살아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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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뽕나무 아래 보자기 만한 그물 하나를 펼쳐 두었을 뿐인데
만지면 검붉은 물감빛이 뚝 뚝 묻어 나도록 익은 오디들을
효소를 담글 만큼에 더 해
오디주를 한동이나 담궜고
저기 먼 대처에서 오신 손님의 팔이 무겁도록 들려 드리고도
여전히 넘치고 넘쳐서 무량한 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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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무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보다는
일거리가 없으면 일거리를 만들기 위해
일거리가 있으면 그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종 종 종 종 바쁜 시골살이 인데
새볔부터 가랑비 오시고 추녀 끝에 골져 흐르는 초록 낙수...
세상이 드디어 모계 중심 사회로 돌아 가려는지
마나님들 만의 모임이 있다고 몰려 나가시기에
먼 산속에 나 처럼 버려 질 것이 뻔한 그님 청하여
낮술 한잔 치고
뱃고래 훤히 들어 내 놓은채 곤한 낮잠을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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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그늘의 틈새와
살 오른 숲 속에서 훨씬 명랑해진 산새들
한낮이 이울도록 수다스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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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밥에 고추 곁순을 아무렇게나 무쳐 차린 밥상에는
잎 연한 상추와
집 주변 어디나 가릴 것 없이 우쭐 자라 있는 왕고들빼기와
이런 저런 푸성귀들이 가득이다
갈치 속젓을 장 대신 넣은 쌈을 볼 터지게 넣으며
이 무슨 산 중 호강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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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빛 산딸기와
앵두와
오디와
자두와
왼갖 푸새들이 넘쳐나는 날들
화수분이 별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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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왕성하던 감자 줄기가 푸석하게 주저앉고 있다
그 옹골진 푸름들
알알이 감자 속에 들어 앉아
김 오르게 쪄 내면 포실포실한 분이 되어 살아 날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