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토골 일기

왕재수

햇꿈둥지 2008. 8. 27. 09:27

 

 

 

#.

"도대체 그 집 농사는 알 길이 없어 밭에 사람 붙어 있는 꼴을 못 보겠는데도

병 한번 없이 그렇게 잘 되니..."

날나리 농사에 대한 마을 노인들의 총평이다

올해도

고추 농사는 대박 이었다

다른 해 같지 않게 풀밭이 되지 않았음은 둘이 감당 할 수 있을 만큼의 넓이이기 때문 이라는 결론 외에 비료 한번 얹어 주지 않았음에도 

고춧대는 싱싱 울울창창 하고

고추들은 주렁주렁 울긋불긋...하다 

 

철딱서니 없는 날나리 농부의 결론,

 

마누라는 아직도 쎅쒸...허다...

 

#.

아이 낳던 날

오전부터 억센 바람이 불더니 후천성 역마살이 붙었는지

서울에서 춘천으로 한바탕 돌아치기를 끝낸 딸녀석이 집으로 돌아 온다는데

아이보다 먼저 문자가 들이 닥쳤다

 

"먹고 싶은 것

1. 핏자

2. 순대국

3. 엄마 아빠의 강추에 의한 럭셔리 푸드..."

 

놀구 있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기꺼이 감읍하여 무작정 털리기를 결심 했는데

작정한 음식점을 코 앞에 두고 비명 섞인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 나 먼저 가야 돼 우리집 위쪽 하늘이 새까만게 비가 오는 모양인데 고추 걷어야 한다구..." 그리구 아내는 똥침 맞은 손오공 근두운 몰듯이 휭하니 사라져 버렸다

의리가 있어야지...

옆집 아줌마 일도 아닌데...집으로 가자...

 

하여 허위 허위 내 집에 당도해 보니

세상에 뭐 이런 일이 다 있지?

고개 넘어 시내에 퍼붓던 비가 고추 널린 꼭대기는 말짱 했다는 것...

 

"느이 엄마 쎅쒸에 더 해 재수도 끝내 준다 그치?..."

 

#. 

풀숲으로 사라지는 뱀의 꼬리처럼 어둠이 밀려 나고 있었고

새벽 이었다

 

밤 사이 빛나던 별들은

몽땅 시린 이슬이 되어 풀잎에 눕고

건들 건들 바람 마중을 하는 풍경

그 맑은 소리 끝마다

가을이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