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토골 일기

산문에 기대어 하늘을 마신다

햇꿈둥지 2006. 11. 6. 15:37

 

 

ㅁ.

찬비가 내린 뒤에

헝클어진 바람들이 풀린 실타래 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윤기나는 초록으로 햇빛을 되 비취던 잎들은

푸석하고 시름없는 빛들로 속절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엽서 같은 낙엽 몇장을 들여다 보니

또박한 글씨로 써 있는 글귀

 

"이제 겨울 입니다"

 

 

ㅁ.

기온이 곤두박질 함에 발맞추어서 인지

이장네 배춧값도 곤두박질을 했다

한 포기에 삼천원을 웃돌던 씨 뿌림 철의 그릇된 욕심은

넓게

더 넓게 배추씨를 뿌리는 계기가 됐고

너도 나도 덩달아 뿌려진 배추는 알맞은 가을 날씨를 온몸에 받아

너무 예쁘게 자랐건만

너무 많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쏟아내는 물량의 홍수는 당연히 가격 하락의 결과를 빚었는데

강원도 밭고랑에서는 대통령만 하염없이 성토되고 있었다

 

대통령,

참 못해 먹을 일 이겠다

 

 

ㅁ.

아랫집 엄씨 노인댁 할마씨께서

깐밤 한봉지를 건네 주셨다

지난해에 혼자 되신 뒤로 특별히 정 붙일 곳 없는 할머니를

아내는 들며 날며 어머니 대하듯 하는 모양 이더니만

받기만 하고 나눠 줄 것이 없어 미안 하다던 할머니께서

어둔 저녘 흐린 불빛 아래서

가슴을 조각 조각 벗겨 나눠 주셨다

 

울컥 눈물이 난다

 

 

ㅁ.

해 넘어 가기 바쁘게

집 주변에 수선스런 움직임들이 바쁘다

도둑 고양이들이 창고며 농구 저장 장소 으슥한 곳마다 둥지를 틀고

예의 용의 장소에는 헌 옷가지들이 아내의 손길로 놓여질 것은 물론

때 거르지 않게 음식들이 놓여질 것이 분명하다

찬 비를 따라

앙칼진 바람이 몰아 닥칠텐데

구멍 숭 숭 뚫린 벽을 메우기 보다는 이따위 일들이 월동 준비가 되는

열한번째의 겨울

 

비디오 테잎으로

열한마리의 고양이 만화나 보며 봄을 기다려야겠다

 

 

ㅁ.

마을 아래 반장네 집 곁을 흐르는 개울둑이

지난 칠월 호우로 무너져 내렸었는데

여름 가을 다 가도록 버려 두었던 곳에 지난 몇일 전 부터

장비와 인부들이 투입되어 정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말끔한 입성의 면서기인지...

면사무소의 재해복구 담당 이라고 자기를 소개 했었다

 

재해?

 

사람의 입장에서야 무너지고 쓸린 자리가 재해 이겠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복구 아니었을까? 

 

 

ㅁ.

겨울이 닥아오는 만큼

시골의 집들은 뒷산 언덕에 더욱 낮은 모습으로 기대어지고 있다

아니다

계절과 추위의 계곡 속으로 가라 앉아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겹겹의 눈이 내리고

마을 모든 것이 꽁 꽁 얼어 붙어 버리면

아침 이거나 저녘 잠깐씩 안부의 봉화 같은 굴뚝 연기가 오르고

해질녘 부터 콩 콩 개들이 짖어

밤은 더욱 무거워지는 계절

 

나무들은

산들은

어쩌자고 이 추운 시간들 앞에 벌거숭이가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