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토골 일기

기어이 봄

햇꿈둥지 2007. 3. 2. 11:16

ㅁ.

정월 초이튿날 아지랑이 처럼 비틀 거리는 호랑나비를 만나고

집안으로 꼬물 꼬물 날벌레들이 날아들고

겨우내 꽁 꽁 닫혔던 문들을 함부로 열어 놓아도

몸 시리지 않은 햇살과 바람이 방안까지 들어 옵니다

 

봄이

되었습니다

 

마당가 층층나무 둥치에 귀 기울이면

가지 끝까지 흐르는 달콤한 수액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산과

온 들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울을 떨치고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ㅁ.

마을회관 한 귀퉁이에 잔뜩 쌓여 있던 포대거름을 밭으로 옮깁니다

한 포대의 무게가 20키로그램 이라니

300포대이면 6톤의 무게 입니다

그걸 일일이 들어서

차에 실어서

밭으로 옮겨서

또 들어 내려야 합니다

 

겨우내 늘어지고 처져 있던 상반신의 근육들이 갑작스런 일로 천근만근이 됩니다 

 

농사 짓지 말아야지...

지난 여름과 가을의 햇볕 뜨거운 날들 다져 먹었던 마음은

이미 봄볕에 녹아 바람처럼 떠나 버렸고

여긴 상추를

저긴 고추를

그리고 또 여기는 감자를...

 

만원을 들여

천원 어치쯤을 얻어 먹는 망하는 농사...

 

그러나

얼마나 싱싱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들 인지요...

 

 

ㅁ.

이웃 잘못 두시고

툭하면 그 사악한 이웃의 꾐에 넘어 가시는 영월의 두님 께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꾐에 빠지셔서

이 먼 소토골에서 부터 100포대의 거름을 나르셔야 했습니다

여주 까지의 동행

원주 시내를 경유해서

남의 거름 실어올리는 일까지 내집 일 처럼 도와 주시고

영월인들 거름 파는 곳이 없으랴

이 알량한 사이비 농사꾼 겸 일꾼을위해

닭 삶아 점심상까지 준비해 주시는 수고를 하셨습니다

 

"힘들게 거름 날라 밭에 뿌리고 농사 지어 봐야

  오이 몇개, 고추 몇개, 상추 몇닢을 얻어 먹는 바보 농사..."라고 하시면서도

 

우리는

못내 즐거웠습니다

 

 

ㅁ.

일 마친 저녘부터 하늘이 무거워지더니

이 아침엔 기어이 비 내리십니다

하염없는 낙숫물을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보면

맺힌 물방울 마다 투명하게 도립한 산들...나무들...

 

한 방울

한 방울...들이 봄을 싹 틔우고 대지의 힘을 돋구게 하는 링거액 처럼 느껴 집니다

 

이제

넉넉히 적시어진 이 땅에

치렁한 햇살이 뿌려지고

목에 두르고 싶도록 온순한 바람이 불면

온 들에 화해의 손길 같은 새싹들이 돋아날 것 입니다

 

 

ㅁ.

앞 산에 쓰러진 아름들이 나무둥치 하나를

마을 순기 형님이 느릿 느릿한 톱질로 자르고 계십니다

 

엔진톱으로

왕 잘라 버리면 한나절이 못 걸릴 일일테건만

한 나절 하고도 산그림자가 드리울 시간까지

여전한 속도와

여전한 표정으로 슬근슬근 자르고 계십니다

 

곁을 지나시던

한솔 할아버지가 찾아 오시면 담배 한대 나눠 피우며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윗집 박씨 영감님이 찾아 오시면 또 쉬엄 쉬엄 면소재지 사는 누구 누구의 얘기도 하시다가...

 

일은 속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과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하고 있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몸이 할 수 있는 이상으로의 일은 일이 아닌게여

 욕심이 되고 독이 되어 내 몸도 내 터전도 죄다 맹개지게 되는거여~"

 

일 인듯,

놀이 인듯,

 

농사도

이렇게 슬근슬근 해야 하는 일 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