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國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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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 가는 길,
길 가에 버려지듯 서 계신 마애불을 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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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안에 야생화? 한송이 헌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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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을 든 자와 돌을 든 자의 대결,
자비 넘치는 땅에 조차 사람의 일은 여전히 억울했다.
부처님께 일러 바치고 싶을 만큼...그 세월 300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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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고 힘든 세월 다 보냈어도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상채기 처럼
그렇게 남겨진 놀이,
남아프리카와 크리켓 경기가 한참 이어서 성벽 가득한 구경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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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부터 동서 문물 교류의 중심 도시였던 갈레는 성서시대의 전설에도 등장한다.
이스라엘 솔로몬 왕이 시바여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보낸 사절단의 배가 도착한 곳이 이곳 갈레라는 것이다.
실증적 기록에는1505년 포르투칼 동방 함대가 이곳에 닻을 내리면서 무역항으로 개발된 것을 시작으로 한다.
갈레라는 지명도 이때 만들어졌으며 몰디브를 점령한 포르투칼 함대가 스리랑카 남부에 첫 상륙을 한 뒤 수탉 우는 소리를 듣게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작은 성채를 조성하고 포루투칼 양식의 교회도 세웠지만 원주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콜롬보 항으로 옮겨갔다.
후에 그들은 성채 주변의 성벽과 요새를 확장 하였는데 당시 주 방어 대상은 스리랑카 원주민과 토착 세력이었기에
바다보다 육지로 연결된 입구를 더욱 두껍고 높게 쌓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포루투칼은 1640년 네덜란드에게 지배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이곳을 점령한 네덜란드는
포르투칼이 쌓은 성채를 부수고 새로이 36헥터 면적의 성채를 만들었다. 이때 쌓은 성채가 현재 갈레의 성이다.
그 뒤 133년이 지난 1796년 영국이 네덜란드를 몰아 내면서 스리랑카 전체를 식민 지배 하게 되었고
이때도 갈레는 지배 세역의 거점이 되면서 요새 도시로 번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콜롬보에 신항 건설을 하고 거점을 변경 하면서 스리랑카의 중심은 점차 콜롬보로 이관 되었고
갈레는 현재처럼 시간이 멈춘 해안 도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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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군 대신 관광객이 시끄러운 거리.
한낮 집안에서의 무료를 거리에 쏟아 버리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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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거북이 연구 보호센터,
스스로 천년을 사는 목숨들이 백년도 못 사는 사람의 손에 위탁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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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잘 시간을 아껴 준비한 락키를 일일히 손목에 묶어준 '훤' 부부와
길가 식당에 앉아 소 만큼씩 밥 먹고 헤어지기로 한다.
우리 모두는 이제 마지막 일정,
훤 부부는 몇일을 더 체류한 뒤 유럽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저 나뭇잎이 가르키는 바람이 불어 오는 곳으로,
스리랑카 여행을 준비하며 만들었던 부채 하나 건넸다.
藕.斷.絲.連(우.단.사.연)
연 뿌리를 잘라도 그 안의 실은 끊어지지 않듯이 찔기게 붙어 댕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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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한가운데 있는 스리랑카 국회의사당,
물 처럼 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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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보 시내의 국제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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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기념관
이국의 여행자들만 하나 가득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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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과 수녀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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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양 예불 중인 스님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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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사이의 시바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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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중인 개신교회
사람의 집과 오래된 나무를 피해 꼬불탕 길을 내고
나무보다 높은 집을 짓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사람의 집과 오래된 나무를 베어 곧고 넓은 길을 내고
나무보다 더 높은 적층의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현대 문명이라는 허울로 진행되는
또 다른 침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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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했던 본래의 것들이
박물관으로 옮겨지거나
더러는
박제되어 버리는 오늘,
그러므로 스리랑카여
이제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