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람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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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고추가루,

#. 햇볕에 말린 태양초는 양건이라 하고 건조기로 말린 고추는 화건, 건조기와 햇볕을 반반쯤 섞어 말린 고추는 반양건이라 한다더라. #. 시골살이 처음으로 냉(冷)건을 시도 중이다. #. 의도된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게으름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 11월 이른 추위에 살짝 얼다가 녹다가 제 풀에 지쳐 반 넘어 마른 고추를 이제야 거두어 말린 뒤 가루 지었다. #. 냉건하여 만들어 낸 게으름(懈) 고추(椒), 해초(懈椒)라고 해야하나? #. 맛이야 어찌됐건 얼었다 녹아 고춧가루가 되었으니 어느 음식에 들어가든 시원한 맛은 분명 할 듯,

소토골 일기 2023.11.22

어쨌든 김장,

#. 여름 내 애써 키우고 말린 고추를 가루 짓고 지난 우박에 구멍이 나기도 한 무 배추를 거두어 김장을 한다. #. 곱게 포장된 포기김치가 집 앞 편의점 매대에 사철 누워있고 재료가 아닌 완결된 음식이 전화 한 번으로 집까지 배달되는 시대의 김장이란 #. 다분히 관성적 행위 일수도 있겠다. #. 그러나 김치 속에서 띄엄하게 만나지는 노을빛 연서 같은 나뭇잎 이거나 김치가 만들어지는 동안 먼 길을 온 사람들의 왁자한 수다와 집 안팎을 소요롭게 뛰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들이 #. 서로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한겨울 곰삭은 맛을 우려내는 가슴 따듯한 사람의 음식이 될 터이니 #. 나눈 뒤에 조차 아쉬움 가득한 정 까지 더불어 익을 것이다. #. 어쨌든 김장했다. 그리하여 겨울이 되든 말든 흰눈이 오든 말든, #...

소토골 일기 2023.11.16

가을 절명,

#. 어깨 통증이 제법 가벼워진 날 치통이 시작되었다. #. 위로 아래로 안으로 밖으로 어디 한 곳 성한 데가 없다. #. 뽑기를 각오하고 병원엘 갔더니 '그래도 본래 이빨이 제일 좋은 것'이라며 그냥 씌워서 더 쓰시라는 젊은 의사, #. 중단했던 새벽 책 읽기를 살곰 살곰 다시 시작, #. 또 비 오시고 바람 불더니 한파주의보가 발령되었다. #. 가을은 변변한 인사도 나눌새 없이 절명해 버려서 마당 가득한 나뭇잎들의 순교, #. 서리는 기본 때때로 살얼음, #. 여전히 알록달록 흐드러진 뜨락의 국화꽃을 어이할꼬

풍경소리 2023.11.11

어느새 겨울,

#. 푸르렀던 생명들이 속으로 여물어 자못 숙연한 계절, #. 누옥의 창문을 모두 닫는다. #. 겨울준비 삼아 집 주변을 정리한다. 그래봤자 이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것들을 저 구석에 다시 감춰두는 일, #. 작은 바람에도 함부로 떨어지는 나뭇잎들, #. 세월조차 함부로 쏟아져 어느새 십일월의 첫날, #. 흐리고 비가 내리고 그 빗 속에 겨울이 내렸다. #. 모서리 날카로운 바람이 자주 문틈을 기웃거리고 이르게 서리도 눈도, 덤으로 우박도 내렸으므로 가을은 가만히 등 돌려 서러운데 추녀끝 바람 가득 어느새 겨울,

소토골 일기 2023.11.01

좌충우돌 시골살이

#. 먼 도시 병원의 cancer center, 이런저런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던 의사는 6개월 검진 기간을 1년으로 늘였다. #. "깨끗하고 좋다"는 짧은 소견, #. 그가 정 해준 1년의 시간이 어쩔 수 없이 내 미래의 전부가 되는 아프고 우스운 오늘, #. 해도 해도 하는 사람의 노고일 뿐, 일 한 자리 표도 나지 않는 억지 이거나 안 해도 될 일...들의 끝에 어깨와 목의 통증이 갈수록 심해졌으므로 묵히고 키운 후에 정형외과를 찾아 처방보다 먼저 핀잔을 들어야 했다. #. 손바닥이 온통 거칠어질 만큼 고된 일들을 잠시 접어 두고 작업복 대신 정장으로 포장을 바꾼 뒤 음악회를 간다. #. 도시의 밤 한켠이 베토벤의 선율에 젖어 있던 시간, 소토골 하늘에는 하마스의 로켓포 같은 우박이 퍼 부어졌으므로 ..

소토골 일기 2023.10.27

청출어람,

#. 상강 전부터 쏟아붓던 서리의 공습을 피해 화분들은 모두 집안으로 대피했다. #. 서리의 낭비 이거나 겨울 남용이다. #. 일찌감치 제설 장비를 점검한다. #. 이른 새벽에 쌀을 씻다 보니 반쯤 남은 고구마가 있길래 깍둑썰기 하여 밥솥에 넣었다. #. 드디어 마누라에게 배웠으나 마누라를 능가하는 밥쟁이가 되어가는구나, #. 시월 하고도 스무 나흗날 가을 깊은 새벽에 밥 익는 냄새에 취해 반가사유의 청승,

풍경소리 2023.10.24

겨울로 가는 길,

#. 추운 거미는 단풍잎과 이슬로 연명 중, #. 박제된 여름, #. 예보된 1℃에 산골짜기 하늘은 마음 놓고 무서리를 쏟아부었다. #. 뜨거웠던 여름의 기억조차 세월의 나이테에 묻혔으므로 누옥의 창문을 모두 닫는다. #. 길게 누운 산그림자 끝에 앉아 고구마 대신 줄기를 거두는 동안 #. 우르르 산비탈을 내려온 바람이 내게 겨울로 가는 길을 물었다.

소토골 일기 2023.10.18